나이테 견본 · 전문 무료 공개

순자의 계절

김순자 · 1949년 남해에서

이 책은 견본입니다. 김순자 님은 가상의 인물이며, 실제 고객의 기록이 아닙니다. 나이테로 만들면 어떤 책이 나오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기 위해 같은 방식으로 집필·조판한 것입니다. 실제 책은 A5 양장(하드커버) 3권으로 제작됩니다 (990,000원).
차례 바다가 키운 아이열아홉의 부산목수의 아내셋을 키우며순자국밥 삼십 년요즘의 나

모두 6장 · 24,451자 · 사진 20장

미영이, 성진이, 미란이에게.
그리고 지우, 하준, 서연이에게.

이 책은 김순자 님이 나이테에 남긴 이야기를 엮은 것입니다. 남해 바닷가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국밥집을 삼십 년 지켜 온 한 사람의 계절이, 본인의 목소리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바다가 키운 아이

내가 난 곳은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다. 1949년, 나라가 갈라지기 한 해 전이었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집이 스무 채나 되었을까. 다들 초가였고 담이라고 해봐야 어른 허리께밖에 오지 않아서, 옆집에서 오늘 무슨 반찬을 놓았는지가 훤히 보였다. 누구 집에 손님이 들면 저녁이 되기 전에 온 동네가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숨을 데가 없는 동네였는데, 그때는 그게 답답한 줄을 몰랐다.

마을 앞으로는 바다가 열려 있었다. 물목이 좁아지는 자리마다 대나무를 엮어 세운 죽방렴이 죽 늘어서 있었다. 물이 들어올 때 함께 밀려온 멸치가 물이 빠지면서 그 안에 갇히는 것인데, 어른들이 대발 안으로 들어가 뜰채로 건져 올리면 은빛이 한꺼번에 파닥거렸다. 그 소리가 자잘한 빗소리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려고 아침이면 부러 먼 길로 돌아 걷곤 했다.

멸치는 건져 올리는 즉시 삶아야 한다. 조금만 지체해도 살이 물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부터 마을 곳곳에서 솥이 끓었고, 그 냄새가 안개처럼 낮게 깔려 마을을 덮었다. 나는 아침마다 그 비린내로 눈을 떴다. 어릴 때는 그게 지겨웠다. 옷에도 배고 머리카락에도 배어서 학교에 가면 남해 아이라는 걸 냄새로 안다고들 했다. 그런데 부산에 나와 살면서부터는 그 냄새가 그리웠다. 지금도 어디선가 멸치 삶는 냄새가 나면 그 마을이 통째로 되살아난다. 사람 얼굴은 세월이 가면 흐려지는데 냄새는 이상하게 그대로 남는다.

우리 집은 방이 둘이었다. 큰방에서 부모님과 우리 삼남매가 다 잤고, 작은방에는 그물이며 어구가 들어차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그 옆에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감나무는 해마다 감을 달았지만 우리 입에 들어오는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익기도 전에 까치가 먼저 쪼아 먹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걸 두고 까치 밥이라고 하시며 내버려 두셨다. 나는 그게 아까워서 장대로 쳐 보려다가 어머니한테 등짝을 맞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그 장독대 앞에 정한수를 떠 놓고 무어라 무어라 하셨다. 나는 방문 틈으로 그 뒷모습을 보곤 했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고 입술만 움직였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끝내 여쭤보지 못했다. 지금 짐작으로는 바다에 나간 아버지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 시절 어촌 아낙들이 새벽에 비는 것은 대개 그것이었으니까.

아버지 김판술 씨는 말이 없는 분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면 사나흘씩 들어오지 않았고, 돌아오면 술을 한잔 하시고 그대로 주무셨다. 우리하고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신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손은 크셨다. 장에 다녀오시는 날이면 주머니에서 눈깔사탕이 나왔고, 명절에는 없는 살림에도 아이들 옷을 한 벌씩 해 입히셨다. 말로 하지 않고 손으로 하는 분이었다.

어머니 이막례 씨는 그 반대였다. 하루 종일 입을 놀리면서 손도 함께 놀렸다. 밭에 나가 김을 매다가 물때가 되면 그길로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하셨다. 그 몸으로 어떻게 그걸 다 해내셨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억척이라는 말은 우리 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손이 늘 갈라져 있었고 겨울이면 그 틈으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래도 아프다는 말을 하시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위로 오빠 순덕이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 순임이가 있었다. 오빠는 네 살 위였는데 일찍부터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탔다. 순임이는 네 살 아래로,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내가 가는 데면 어디든 따라왔고, 내가 하는 것이면 뭐든 따라 했다.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동생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순임이하고는 말린 미역을 몰래 뜯어 먹다 들킨 적이 있다. 그게 우리 집 살림에 보태려고 널어 둔 팔 물건이었으니 어머니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회초리를 드시는데 순임이가 먼저 울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나만 맞았다. 언니가 되어서 동생을 꼬드겼다는 것이었다. 억울해서 저녁도 안 먹고 누워 있었는데, 순임이가 슬그머니 들어와 제 몫으로 받은 미역 한 줌을 내 앞에 밀어 놓고 나갔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어린 것이 그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그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이 미안한 걸 아는 데는 나이가 필요 없는 모양이다.

학교는 삼동국민학교였다. 집에서 십 리 길이었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어림도 없는 거리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다녔다. 첫날은 오빠가 손을 잡고 데려다주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갔는데 흙길이 파여 있어 자꾸 벗겨졌다. 몇 번을 주저앉아 다시 신다가 결국 손에 들고 맨발로 걸었다. 발바닥이 뜨거웠던 것이 기억난다.

교실에 들어서니 나무 냄새가 났다. 책걸상이 다 나무였고 바닥도 나무였다. 창으로 들어온 볕에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이 이름을 하나씩 부르는데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심장이 쿵 했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학교에서 불리는 이름이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종이에 써서 보여주셨다. 김순자. 세 글자였다. 어머니는 글을 많이 배우신 분이 아니었는데 당신 이름과 자식들 이름은 쓸 줄 아셨다.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내가 소리로만 알던 것이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종이를 접어서 한동안 품고 다녔다.

여름이면 아이들끼리 개울에 나갔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들어가면 발가락 사이로 진흙이 밀려 올라왔다. 돌을 들추면 미꾸라지가 흙탕을 일으키며 달아나는데 그걸 손으로 덮쳐 잡았다. 잡은 것은 깡통에 담아 두었다가 저녁에 어머니께 드렸다. 추어탕이 끓는 날은 온 식구가 상 앞에 둘러앉았다.

겨울에는 공기놀이를 했다. 동네에서 내가 제일 잘했다. 다섯 알을 던져 올리고 받는 데 손이 남들보다 빨랐다. 아이들이 나를 이기려고 몰려들었지만 좀처럼 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무슨 대단한 재주인 줄 알았다. 나중에 그 손으로 삼십 년 동안 국을 뜨고 그릇을 나르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사람한테 주어진 것은 언젠가 어디에든 쓰이는 모양이다.

명절이 오면 온 동네가 우리 집 마당에 모였다. 우리 집 마당이 제일 넓었기 때문이다. 남정네들이 번갈아 떡메를 치고 아낙들은 옆에 앉아 물을 발랐다. 떡메가 내려칠 때마다 퍽, 퍽 하는 소리가 담을 넘어갔다. 김이 확 올라오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뜨거운 것을 손으로 뜯어 먹었다. 입천장을 데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때 먹던 인절미 맛은 요즘 파는 것과 아주 다르다. 쫄깃한 정도가 다르고 콩고물 냄새가 다르다.

평소 밥상은 단출했다. 보리밥에 시래깃국, 김치. 그리고 어머니가 하시던 멸치조림. 그날 잡은 멸치를 간장에 조려 보리밥 위에 얹어 먹으면 그것으로 한 끼가 되었다. 반찬이랄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배가 고파서였겠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도 나중에 밥장사를 하면서 그 조림을 몇 번이나 해봤는데 끝내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재료가 달라서인지 물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그때의 내가 없어서인지.

열 살쯤 되던 해에 큰 태풍이 왔다. 어른들이 사라라고 불렀다. 아침부터 하늘이 누렇더니 오후에 바람이 뒤집혔다. 지붕이 날아가는 집이 있었고 배가 뭍으로 밀려 올라온 집도 있었다. 그날 아버지 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저녁도 짓지 않고 바닷가로 나가셨다. 나도 따라 나갔다. 비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어서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바다 쪽만 보고 계셨다. 그렇게 밤을 넘겼다.

새벽녘에 배가 들어왔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등불이 오갔다. 아버지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쪽으로 가지 않으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집으로 걸어가셨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 걸으면서 어른이라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제일 무서웠던 밤을 넘기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것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꿈은 선생님이었다. 사학년 때 담임이셨던 김선희 선생님 때문이다. 도시에서 오신 분이라고 했는데 말투가 우리와 달랐고 손이 하였다. 분필을 잡은 그 손이 그렇게 부러웠다. 우리 어머니 손하고는 너무 달라서, 세상에는 저런 손도 있구나 싶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내 공책을 들여다보시더니 글씨가 야무지다고 하셨다. 딱 그 한마디였다. 그런데 그 말이 오래갔다. 살면서 나를 칭찬해 준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부모님은 칭찬하는 법을 모르는 분들이었고, 동네 어른들은 여자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 한마디를 오래 씹었다. 나중에 내 아이들 공책을 검사할 때마다 그 선생님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한테 잘한다는 말을 자주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집 형편에 여학교는 어림도 없었다. 오빠도 국민학교만 마치고 배를 탔으니 나는 말을 꺼내볼 자리도 없었다. 졸업하던 날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다 그만두셨다. 나도 묻지 않았다.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꿈을 접었고, 그 뒤로 오래 잊고 살았다. 그런데 훗날 내 딸들이 공부를 더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어떻게든 시켰다. 남들은 딸자식 공부시켜 뭐하냐고 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내가 못 산 것을 아이들이 대신 살아 주는 것. 부모라는 게 그런 자리인 모양이다.

옆집에 정옥이라는 아이가 살았다. 나하고 동갑이었고 학교도 같이 다녔다. 십 리 길을 둘이 걸으면서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어느 집 아주머니가 무섭다는 이야기. 개울에 갈 때도 같이 갔고 공기놀이도 같이 했다.

내가 부산으로 나오면서 소식이 뜸해졌다. 몇 해 뒤에 정옥이가 마산으로 시집을 갔다는 말을 건너 들었다. 그 뒤로는 끊겼다. 편지 한 장 하려고 해도 주소를 몰랐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사람이 그렇게 사라졌다. 요즘처럼 어디서든 연락이 닿는 세상이 아니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마산이 나오면 나는 저 어디쯤에 살고 있을까 생각한다. 잘 살고 있으면 됐다. 그것 말고는 바랄 것도 없다.

열아홉의 부산

열아홉이 되던 해 봄에 나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1968년이었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나가 계셨고 어머니가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셨다. 잘 가라는 말도, 몸조심하라는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등을 한 번 쓸어 주고 돌아서셨다. 나는 그게 서운했는데, 나중에 내 딸을 서울로 보내면서 알았다. 말이 안 나오는 순간이 있다.

남해에서 부산까지가 지금은 두 시간이지만 그때는 딴 나라로 가는 일이었다. 버스를 갈아타고 배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탔다. 자갈치에 내려서니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몰려왔다. 생선 상자 부딪히는 소리, 얼음 깨는 소리, 값을 흥정하는 소리. 우리 마을에서는 소리라고 해야 파도 소리하고 바람 소리뿐이었는데. 나는 보따리를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제일 큰 일이었다. 그 뒤로 무슨 일을 하든 그날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결혼을 할 때도, 애를 낳을 때도, 가게를 열 때도. 나는 늘 그날의 자갈치를 떠올렸다. 그것보다 무서운 건 없다고.

자갈치 근처 국제상회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그릇하고 잡화를 파는 가게였는데 주인 내외가 그렇게 모진 분들은 아니었다. 아침 일곱 시에 문을 열고 밤 아홉 시에 닫았다. 하루 열네 시간이었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일했다. 잠은 가게 뒤 쪽방에서 다른 점원 아이들하고 같이 잤다.

그 시절의 나는 말수가 적고 손이 빨랐다. 남들이 하나를 할 동안 나는 둘을 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순자는 손이 야무지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좋아서 더 빨리 움직였다. 지금 생각하면 칭찬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쉴 줄을 몰랐던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했다.

웃음도 헤프지 않았다. 그때 사진을 보면 표정이 참 굳어 있다. 무엇이 그리 무거웠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고향 생각이었는지, 돈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열아홉이 원래 그런 나이인지.

첫 월급은 봉투에 담겨 나왔다. 손에 쥐어 보니 생각보다 얇았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세어 보지 않았다. 쪽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어 봤다. 몇 번을 세어도 같은 숫자였다.

그 돈으로 제일 먼저 어머니 내복 한 벌을 샀다. 국제시장 골목에서 제일 두꺼운 것으로 골랐다. 그리고 순임이 운동화 한 켤레. 그 애가 신발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은 돈은 봉투째 고향으로 부쳤다. 내 것은 하나도 사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우체국 앞에서 봉투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부치면 없어진다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어른이 됐구나 싶었다. 누가 나를 어른으로 대접해 준 것도 아닌데, 내가 누군가를 먹인다는 사실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날 저녁밥이 유난히 달았다.

부산의 첫 겨울이 제일 힘들었다. 쪽방이 어찌나 추운지 연탄불이 꺼지면 자리끼가 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 손이 트고 발뒤꿈치가 갈라졌다.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안 나게 울었다. 옆에 다른 아이들이 자고 있었으니까.

그때 영옥이가 나를 제 방으로 데려갔다. 같은 상회에서 일하던 아이인데 나보다 한 살 위였고 자취방이 따로 있었다. 둘이 한 이불을 덮고 그 겨울을 났다. 영옥이는 코를 골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사람이 옆에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는 걸 나는 그때 배웠다.

영옥이하고는 붙어 다녔다. 쉬는 날이면 국제시장 구경을 갔다. 사지도 못할 옷을 한나절 구경만 했다. 점원이 눈치를 주면 다음 가게로 옮겼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팥빙수 하나를 시켜 둘이 나눠 먹었다.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가운데부터 파먹었다. 그것이 우리 사치였다.

스물한 살 무렵에 둘이 광복동 사진관에 갔다. 사진 한 장 찍는 데 며칠 치 밥값이 들었지만 그날은 큰맘을 먹었다. 나란히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흑백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내 젊은 시절 사진의 거의 전부다. 지금도 앨범 첫 장에 그 사진이 있다. 가끔 들여다보면 저 애가 나였나 싶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는 야학에 다녔다. 상회 문을 닫고 뛰어가면 늦기 일쑤였다. 뒷자리에 앉아 졸다가 선생님한테 지적을 당하면 그렇게 창피했다. 그래도 그만두지는 않았다. 국민학교만 나온 것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자를 몇 자 더 배웠다. 그때는 이걸 배워서 어디에 쓰나 싶었다. 그런데 훗날 가게 장부를 쓸 때 그것이 다 쓰였다. 거래처 이름도 한자였고 계산서도 한자가 섞여 나왔다. 배움이라는 게 그렇다.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여도 언젠가 한 번은 쓴다.

고향에 배 타던 총각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장에서 마주치면 서로 고개만 숙이고 지나갔다.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다. 그이가 나를 보는 눈길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딴 데를 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부산으로 나오고 그이는 원양어선을 탔다고 들었다. 그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전부가 참 오래 남았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오히려 오래간다.

그 시절 밥상에는 보리밥에 시래깃국, 김치가 올랐다. 고기는 명절에나 보았다. 상회에서 밥을 주기는 했는데 늘 모자랐다.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는 밥에 간장만 비벼 먹은 날이 많았다. 반찬값을 아끼면 고향에 부칠 돈이 늘었으니까.

나중에 국밥집을 하면서 손님 밥그릇을 늘 꾹꾹 눌러 담았다. 남들은 밥을 많이 준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당연했다. 배가 고프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 밥그릇을 보면 그 사람이 오늘 어땠는지가 보인다. 급하게 밀어 넣는 사람, 천천히 뜨는 사람, 국물만 마시는 사람.

소식을 전하는 일도 지금과는 달랐다. 고향에 무슨 일이 생겨도 편지가 사나흘 걸렸다. 답장까지 하면 열흘이었다. 급하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쳤는데 글자 수마다 돈을 받으니 말을 줄이고 또 줄였다. 어머니 위독 급래. 그런 식이었다.

요즘은 손주가 영상으로 얼굴을 보여준다. 서연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실시간으로 조잘거린다. 그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됐다. 나는 가끔 그게 무섭다.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부산에서 삼 년을 그렇게 살았다. 열아홉에 와서 스물둘이 됐다. 그동안 고향에는 두 번 갔다. 갈 때마다 어머니가 조금씩 작아 보였다. 나는 그게 어머니가 늙으신 게 아니라 내가 큰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둘 다였다.

상회 일이라는 게 그릇만 파는 게 아니었다. 아침에 문을 열기 전에 진열대를 닦고, 밤에 닫고 나서 재고를 세었다. 그릇은 깨지기 쉬워서 옮길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하나 깨면 며칠 치 밥값이 날아갔다.

손님 중에는 별사람이 다 있었다. 값을 깎다가 안 되면 침을 뱉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산 지 한 달이 된 그릇을 들고 와서 금이 갔다고 바꿔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일에 이골이 나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다 한번은 내가 말대꾸를 했다. 아주머니가 나중에 조용히 부르셔서, 순자야 손님하고 싸워서 이기는 장사는 없다, 하셨다. 그 말을 삼십 년 뒤에 국밥집에서 매일 떠올렸다.

자갈치 시장은 새벽이 낮보다 밝았다. 경매가 새벽 세 시에 시작되니 그 시간에 불이 다 켜졌다. 나는 상회에 있었으니 경매를 볼 일은 없었지만, 야학에서 늦게 돌아오는 밤이면 시장 쪽 불빛이 보였다. 저 사람들도 자지 않는구나 싶었다.

고향에서 편지가 오면 그날은 잠을 설쳤다. 어머니가 부르시는 대로 순임이가 받아 적은 편지였다. 몸조심해라, 밥 굶지 마라, 돈은 아껴 써라. 늘 같은 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한번은 편지에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시다는 말이 있었다. 그길로 짐을 싸다가 그만두었다. 가면 며칠 치 일당이 없어지고 그 돈이 고향으로 못 간다. 결국 편지만 한 통 써서 부쳤다. 그 겨울에 그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영옥이는 나보다 셈이 빨랐다. 어디에 뭐가 싼지, 어느 가게 주인이 인심이 좋은지를 다 알았다. 나는 영옥이를 따라다니면서 부산을 배웠다. 버스 노선도, 시장 골목도, 값을 깎는 법도.

영옥이가 스물셋에 시집을 갔다. 대구 사람이라고 했다. 결혼식 날 나는 가게 일이 있어서 늦게 갔는데,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던 영옥이가 나를 보더니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날 이후로 몇 번 편지를 주고받다가 끊겼다.

돌아보면 그 삼 년이 내 인생에서 제일 가난했고 제일 자유로웠다. 벌어서 다 부치고 나면 남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그 돈이 내 손을 거쳐 갔다. 누구한테 얻은 게 아니라 내가 번 것이었다. 그 느낌을 나는 오래 기억한다.

스물둘이 되던 해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나는 상회를 그만두는 게 아깝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고 어디 말도 못 했다. 그 시절 여자가 그런 말을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목수의 아내

스물두 살 되던 해 여름에 상회로 목수가 하나 왔다. 주인이 나무 선반을 새로 짜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와서 저녁까지 말 한마디 없이 대패질만 했다. 나는 손님 사이를 오가면서 곁눈으로 봤다. 톱질을 할 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보기 좋았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가면서 그이가 나무 부스러기를 다 쓸어 담았다. 그냥 두고 가도 될 것을. 빗자루를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는데 바닥이 처음보다 깨끗했다. 그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일할 때보다 일 끝내고 가는 모습에서 보이는 법이다.

다음에 또 오길래 물 한 잔을 내주었다. 그이가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맙습니다, 하는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았다. 그것이 우리가 나눈 첫 말이었다.

박정호라고 했다. 나보다 세 살 위였다. 손이 컸고 손톱 밑이 늘 까맸다. 얼굴은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광대가 나오고 눈이 작았다. 말이 없어서 처음에는 무뚝뚝한 사람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는 그때 심장이 뛰어서 말을 못 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러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고 했더니, 말을 하면 더 뛸 것 같았다고 했다.

혼담은 그이 삼촌이 우리 고향에 다녀가면서 정해졌다. 요즘처럼 무릎을 꿇고 반지를 주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어른들끼리 앉아서 말이 오갔고, 아버지가 목수면 손에 기술이 있으니 굶지는 않겠다고 하셨다. 그 한마디로 정해졌다.

나한테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나도 싫지 않았다. 물어봤어도 좋다고 했을 것이다. 다만 물어봐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한다.

1971년 봄에 식을 올렸다. 그날 비가 왔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오후에 쏟아졌다. 마당에 차일을 쳤는데 자꾸 물이 고여서 남정네들이 몇 번이나 밀어냈다. 손님들 신발이 다 젖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어머니가 내 옷고름을 매 주시면서 손을 떠셨던 것만 남아 있다. 어머니는 그때도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나는 신랑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절을 했다.

부산 초량에 단칸방을 얻었다. 부엌은 밖에 있었고 화장실은 여러 집이 같이 썼다. 살림이라고는 궤짝 하나, 이불 한 채, 냄비 두 개가 전부였다. 그이가 나무로 밥상을 하나 짜 주었는데 그것이 우리 첫 가구였다.

그 밥상을 삼십 년을 썼다. 애 셋이 그 상에서 밥을 먹고 숙제를 했다. 다리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한 게 십 년쯤 지나서인데 그이가 그때마다 손을 봤다. 이사를 할 때도 그 상만은 꼭 챙겼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없던 그때가 제일 홀가분했다.

부부싸움도 했다. 돈 때문에 제일 많이 싸웠고, 시댁 일로도 싸웠다. 그이는 싸우면 말을 안 했다. 나는 말을 쏟아냈다. 서로 반대라서 더 답답했다.

그이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몰랐다. 대신 싸운 다음 날 아침이면 국이 끓고 있었다. 자기가 끓여 놓은 것이었다. 맛은 없었다. 간이 안 맞거나 너무 짜거나 했다. 그런데 그 국을 먹으면 화가 풀렸다.

나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 국을 다 먹었다. 그러면 그이가 슬그머니 밥을 더 떠 주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삼십 년을 살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로 다 푼다는데, 우리는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었다.

부부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나는 늦게 알았다. 이기려 들지 않는 것이다. 부부싸움은 이겨도 남는 게 없다. 옳은 소리를 다 하고 나면 그날 밤이 얼음장 같다. 상대는 입을 다물고 나는 이겼는데 기분이 나쁘다.

나이가 들수록 지는 편이 편하더라. 그것을 아는 데 삼십 년이 걸렸다. 좀 더 일찍 알았으면 그이가 덜 힘들었을 텐데.

그이는 평생 나에게 손 한번 대지 않았다. 그 시절에 그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옆집에서 여자 우는 소리가 나는 밤이 한 달에 몇 번씩 있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그이는 조용히 자는 사람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다 준 사람은 아니었다. 목수 일이라는 게 있다가 없다가 하니 어떤 달은 넉넉하고 어떤 달은 빈손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 하나로 그이에게 진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한테 손을 대지 않는 것. 그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별것이다.

결혼하고 십 년쯤 지나서야 둘이 여행이라는 걸 갔다. 경주였다. 아이 셋을 시어머니께 맡기고 하루를 비웠다. 그이가 며칠 전부터 말을 꺼내다 말다 하더니 결국 표를 끊어 왔다.

불국사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둘 다 웃지도 않고 뻣뻣하게 서 있다. 사진 찍는 게 어색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날 저녁에 여관에서 먹은 라면이 그렇게 맛있었다. 애들 걱정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홀가분했다.

연애할 때 두어 번 갔던 송도 바닷가에도 나중에 다시 갔다. 애들 다 크고 나서였다. 그이가 그때 앉았던 자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기, 저 바위 옆이라고. 나는 잊고 있었다. 그이는 말을 안 할 뿐이지 다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대패질을 하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어깨가 들썩들썩하고 대팻밥이 돌돌 말려 나오는데 그 냄새가 참 좋았다. 나무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옷에서도 손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지금도 목재소 앞을 지나면 그이 생각이 난다. 얼굴보다 냄새가 먼저 온다. 냄새가 사람보다 오래 남는다.

신혼 초에 그이가 일을 나가면 나는 종일 혼자였다. 초량 단칸방은 낮에도 어두웠다. 창이 하나뿐이고 그것도 옆집 벽을 보고 있었다. 빨래를 널려면 옥상에 올라가야 했다.

이웃 아주머니들이 나를 새댁이라고 불렀다. 나이가 어려서 다들 딸처럼 대해 주셨다. 김치도 나눠 주시고 반찬도 갖다주셨다. 그 시절에는 그런 게 있었다.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그이는 일이 있는 날은 새벽에 나가 어두워서 들어왔다. 없는 날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그런 날이 나는 더 불편했다. 남편이 놀고 있는 걸 이웃이 볼까 봐.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게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그이는 연장을 아꼈다. 저녁마다 대패날을 갈고 톱니를 손봤다. 마루에 앉아 숫돌에 날을 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바느질을 했다. 우리 신혼의 소리가 그거였다.

한번은 그이가 만들다 만 물건이 있길래 뭐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며칠 뒤에 그게 반닫이가 되어 방에 들어왔다. 내가 옷 넣을 데가 없다고 한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말은 안 하고 만들어 놓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무서운 분은 아니었지만 말씀이 많으셨다. 며느리 흠을 잡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을 많이 하셨다. 나는 말수가 적으니 듣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시어머니가 나를 편하게 여기셨다.

명절에 시댁에 가면 나 혼자 부엌에 있었다. 동서가 없었으니까. 그이가 가끔 부엌에 들어와서 그릇을 나르다가 어머니한테 남자가 부엌에 왜 들어오냐고 야단을 맞았다. 그러면 슬그머니 나갔다가 또 들어왔다.

돈 때문에 싸운 날이 제일 많았다. 목수 일은 일당이라 달마다 들쭉날쭉했다. 나는 아껴야 한다고 했고 그이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둘 다 불안해서 그랬다. 불안한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화를 낸다.

그래도 그이가 술을 먹고 늦는 날은 드물었다. 목수들끼리 일 끝나고 한잔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그이는 한두 잔만 하고 일어섰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집에 사람이 기다리는데 뭘 오래 있냐고 했다.

아이 셋을 낳고 나서는 싸울 시간도 없었다. 눈만 뜨면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게 하루였다. 그이도 일이 늘어서 늦게 들어왔다. 부부라기보다 같이 일하는 사이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좀 크고 나서 어느 날 저녁에 둘이 마루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한참 있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할 말이 없어서 조용한 게 아니라, 말을 안 해도 되는 조용함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셋을 키우며

1972년 겨울에 미영이를 낳았다. 산파 아주머니가 오셔서 방에서 낳았다. 진통이 하루를 넘겼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그러다 첫울음이 터졌다. 어찌나 큰지 옆집에서 무슨 일이냐고 왔다.

그이는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딸이라는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들어와 아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들이 아니라 서운하냐고 물었더니 그이가 고개를 저었다. 손을 아이 쪽으로 뻗었다가 도로 거뒀다. 그때 그이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년 뒤에 성진이가 나왔고 사 년 뒤에 미란이가 나왔다. 셋을 육 년 사이에 낳았다. 그때는 그게 흔한 일이었다. 다만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미란이 낳고 나서 한동안 눈이 침침했다.

이름은 시아버님이 지어 주셨다. 미영, 성진, 미란. 아름다울 미 자를 딸 둘에게 넣으셨다. 나는 다른 이름이 마음에 있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며느리가 아이 이름에 말을 보태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부르다 보니 그 이름들이 아이들에게 딱 맞았다. 미영이는 미영이답고 성진이는 성진이답다. 이름이 사람을 닮는 것인지 사람이 이름을 닮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미영이가 처음 엄마 소리를 했을 때 나는 밥을 먹이다가 숟가락을 놓쳤다. 엄마, 하고 또렷하게 부른 것도 아니고 그냥 엄마 비슷한 소리였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내가 누구의 엄마가 되었구나 싶은 것이, 결혼식 날보다 그때가 더 실감이 났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미란이가 아직 어리고 가게를 막 열었을 무렵이다. 1985년쯤이다. 새벽 네 시에 나가서 밤 열 시에 들어오니 아이들 얼굴을 자는 것만 보았다. 셋이 나란히 누워 자는 걸 보고 이불을 덮어 주고 나면 하루가 끝났다.

하루는 미란이가 나를 보고 낯을 가렸다. 다섯 살이었는데 내 품에 안기지 않고 언니 뒤로 숨었다. 그날 가게 주방에서 혼자 울었다. 앞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그런데 울고 나서도 국은 끓여야 했다.

미영이 소풍날에 김밥을 싸 주지 못한 적이 있다. 전날 밤에 재료를 다 사다 놓고도 새벽에 가게 일이 밀려서 그냥 나가 버렸다. 그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부엌을 보고 어땠을지를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미영이는 빵을 사서 갔다. 나중에 알았다.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미안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나았을 텐데. 지금도 김밥을 보면 그 생각이 난다.

그래도 웃은 날이 더 많았다. 미란이가 다섯 살쯤에 국밥에 설탕을 한 숟갈 넣은 적이 있다. 손님상에 나가기 직전이었다. 엄마 국이 맛없어 보여서 그랬다고 했다.

그이가 그 말을 듣고 배를 잡고 웃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웃는 것을 나는 처음 봤다. 나중에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웃었다. 미란이는 커서도 그 얘기를 들으면 얼굴을 붉혔다.

성진이가 대학에 붙던 날에는 전화를 받고 가게 한복판에서 앞치마를 붙잡고 울었다. 손님들이 다 쳐다보는데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간 사람이 처음이었다. 오빠도 나도 국민학교만 나왔으니까.

그날 손님들에게 국밥을 다 그냥 드렸다. 무슨 좋은 일 있냐고 묻길래 아들이 대학에 붙었다고 했더니 다들 축하한다고 했다. 그날 하루 벌이가 없어졌는데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나들이는 태종대나 송도가 전부였다. 멀리는 못 갔다. 가게 문을 하루 닫으면 그날 벌이가 없었으니까. 김밥을 싸서 버스를 타고 가 바위에 앉아 먹고 왔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날을 제일 좋아했다. 지금 만나도 그 이야기를 한다. 엄마 그때 태종대에서, 하면서 시작한다. 나는 그게 좀 이상하다. 나는 미안한 기억이 더 많은데 아이들은 좋았던 것만 기억한다.

명절에는 가게 문을 닫았다. 일 년에 딱 그때만 쉬었다. 아이 셋을 앉혀 놓고 전을 부쳤다. 성진이는 부치는 족족 집어 먹었고, 미영이는 옆에서 나를 도왔고, 미란이는 텔레비전만 봤다.

그 부엌이 우리 집에서 제일 시끄러운 날이었다. 기름 튀는 소리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그이는 마루에 앉아 그걸 듣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이도 그 소리가 좋았던 것 같다.

가게 보증금 때문에 진 빚이 있었다. 두 번째 가게를 냈다가 접으면서 생긴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밤에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발소리가 나면 얼른 치웠다.

부모는 자식에게 걱정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법이다. 돈이 없다는 걸 알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된다. 그게 싫었다. 지금은 다 갚았고 아이들도 다 컸으니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재산은 없었다. 대신 새벽에 일어나는 걸 보여줬다. 부지런함은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셋 다 게으르지는 않다. 그거 하나는 잘 물려줬다고 생각한다.

지우를 처음 안았을 때는 내 자식을 낳았을 때보다 손이 더 떨렸다. 내 아이 낳을 때는 겁이 없었는데 손주는 무서웠다. 부서질까 봐. 목을 못 가누는 게 그렇게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미영이 어릴 때 얼굴이 겹쳐 보였다. 세월이 한 바퀴 돌아온 것 같았다. 뒤이어 하준이가 왔고 서연이가 왔다. 셋을 다 안아 봤다.

요즘 아이들한테 고마운 것은 셋 다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것이다. 그거면 됐다. 부모한테 잘하는 것보다 자기 살림 잘 꾸리는 게 나는 더 고맙다. 나 걱정 안 하게 해 주는 게 효도다.

가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밥상 앞에 다섯이 앉아 있는 그림이 떠오른다. 그이가 상석에 앉고 아이 셋이 옆에 붙어 앉고 나는 부엌 쪽에 앉았다. 늘 내가 제일 늦게 앉고 제일 먼저 일어났다. 그런데 그 장면이 가족이다. 지금은 그 다섯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일 년에 한 번이 될까 말까 한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제일 무서웠던 것은 아프는 일이었다. 성진이가 세 살 때 밤에 열이 펄펄 끓었다. 병원이 문을 닫은 시간이라 업고 뛰었다. 그이가 앞서 뛰고 내가 아이를 업고 따라갔다.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히는데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있었고 그이는 복도에 나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벽에 기대서 울고 있었다. 그이가 우는 걸 나는 그때 처음 봤다.

아이들 셋이 다 다르다. 미영이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다. 동생들을 챙기고 내 눈치를 봤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미안하다. 맏이라서 어린 시절이 없었다.

성진이는 고집이 셌다. 한번 아니라고 하면 끝까지 아니었다. 학교에서 선생님하고 부딪힌 적도 있다. 나는 그때 아이 편을 들지 못했다. 선생님한테 죄송하다고 하고 집에 와서 아이를 나무랐다.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미란이는 막내라 응석받이였다. 그런데 정이 제일 많다. 지금도 전화를 제일 자주 하는 게 미란이다. 엄마 밥 먹었어, 하고 묻는다. 별 얘기도 안 하고 끊는다.

아이들 옷은 대개 물려 입혔다. 미영이가 입던 걸 미란이가 입고, 성진이는 사촌 형 것을 받았다. 새 옷은 명절에나 한 벌씩 샀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걸 서운해한 기억은 없다. 다들 그랬으니까.

학교 준비물을 못 챙겨 준 날이 많았다. 가게에 나가 있으니 알림장을 볼 시간이 없었다. 미영이가 동생들 것까지 챙겼다. 어느 날 미영이 알림장을 봤더니 준비물 옆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밑에 자기가 사야 할 것들을 적어 놨다.

그걸 보고 가게에서 한참 앉아 있었다. 열 살짜리가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미영이한테 아무 말도 못 했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안 나왔다.

아이들이 하나씩 집을 떠났다. 미영이가 먼저 결혼했고 성진이가 서울로 갔고 미란이가 마지막이었다. 미란이 짐을 싸는 날 나는 부엌에 있었다. 나가는 걸 못 보겠어서.

집이 조용해지는 게 그렇게 이상했다. 삼십 년을 시끄럽게 살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귀가 멍했다. 그이하고 둘이 남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아이들 얘기 말고는 서로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둘이 저녁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가게를 접고 나서였다.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오늘 뭐 했냐고 묻고 대답했다. 별것 아닌 얘기를 오래 했다. 그 몇 년이 결혼 생활에서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순자국밥 삼십 년

1985년에 가게를 열었다. 그해 그이 일이 뚝 끊겼다. 목수 일이라는 게 있다가 없다가 하는데 그해는 유난히 길었다. 석 달을 놀았다. 그이가 아침마다 연장 가방을 들고 나갔다가 저녁에 그대로 들고 들어왔다.

아이 셋을 두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서겠다고 했더니 그이가 아무 말도 안 했다. 반대도 안 하고 찬성도 안 했다. 며칠 뒤에 시장 끝에 자리가 하나 났다는 말을 해 왔다. 그게 그이 방식이었다.

밥은 내가 할 줄 알았다. 남해에서 어머니가 하시던 걸 봤고 상회에서도 밥을 지었다. 국밥을 고른 건 재료가 단순해서였다. 돼지 뼈하고 물이면 된다.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팔린다.

간판에 순자국밥이라고 썼다. 그이가 나무판에 직접 새겨 주었다. 페인트칠까지 해서 걸었는데 그 간판을 삼십 년 걸었다. 비를 맞고 색이 바래도 갈지 않았다.

새벽 네 시에 나가 육수를 앉혔다. 뼈를 씻어 초벌로 끓여 버리고 다시 앉히면 여섯 시가 된다. 그때 문을 열었다. 첫 손님은 대개 새벽일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말없이 먹고 말없이 나갔다.

겨울이면 손이 갈라졌다. 물에 손을 담갔다 뺐다 하니 틈이 벌어지고 피가 났다. 밴드를 감고 일했는데 물에 젖으면 소용이 없었다. 십 년쯤은 발바닥이 늘 아팠다. 하루 열여섯 시간을 서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가 제일 벌었다. 몸이 상하는 만큼 벌었다. 그게 맞는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지킨 것은 하나였다. 육수는 속이지 않는다. 장사가 안되는 날에도 뼈를 줄이지 않았다. 뼈를 줄이면 그날은 넘어가지만 손님이 안다. 한 번 온 사람이 안 오는 것으로 안다.

어차피 먹어 보면 다 안다. 그리고 한 번 속이면 그다음부터는 나부터 부끄러워서 그 국을 못 뜬다. 손님한테 국을 내밀면서 눈을 못 마주친다. 삼십 년을 하면서 그것 하나는 지켰다.

주방은 순덕 엄마와 십오 년을 함께 봤다. 나보다 두 살 위였는데 손이 참 야무졌다. 처음에는 설거지만 하다가 나중에는 육수까지 봤다. 내가 아이들 일로 자리를 비워도 그이가 다 감당해 주었다.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둘이 주방에서 하루 종일 일하면서 몇 마디 안 했다. 그런데 손발이 맞았다. 내가 국자를 들면 그이가 그릇을 대고, 내가 뒤를 돌면 그이가 비켜섰다.

가게를 접던 날 우리는 손만 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 고생했다는 말도 못 했다. 지금은 요양원에 계신다고 들었다. 한번 가 봐야지 하면서 못 가고 있다.

그만두고 싶은 날은 셀 수도 없었다. 손님이 없는 날, 손님이 진상인 날, 몸이 아픈 날. 특히 비 오는 날이 힘들었다. 손님은 없는데 육수는 이미 끓여 놨으니까.

그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아이 셋이 있었다. 미란이 학비 낼 날이 다가오면 다시 앞치마를 맸다. 대단한 사명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먹여야 하니까 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

1990년대 초에 두 번째 가게를 냈다가 이 년 만에 접었다. 욕심을 낸 것이다. 첫 가게가 자리를 잡으니 하나 더 하면 두 배가 되겠다 싶었다.

자리도 제대로 보지 않고 남이 좋다니까 들어갔다. 유동인구가 많다고 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만 많고 앉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지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은 다르다는 걸 그때 배웠다.

보증금을 거의 날렸고 그 빚을 오 년 갚았다. 그 뒤로는 한 솥만 봤다. 돌이켜보면 그 실패가 나를 지켜 준 셈이다. 그때 안 망했으면 나중에 더 크게 망했을 것이다.

1997년에 나라가 어렵다고들 했다. 그런데 우리 가게는 오히려 손님이 늘었다. 비싼 데를 못 가니 국밥집으로 온 것이다. 매출로만 보면 그해가 좋았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회사에서 잘렸다는 손님이 낮술을 하고 우는 것을 여러 번 봤다. 넥타이를 맨 채로 국밥집에서 우는 사람을. 그럴 때는 밥을 더 담아 드렸다. 그것 말고는 해 드릴 게 없었다.

한 달 정산해서 좀 남는 달이면 통닭을 한 마리 사 들고 갔다. 아이들이 그 봉지를 보면 소리를 질렀다. 그이는 다리를 아이들에게 주고 목만 뜯었다. 나는 껍질만 먹었다. 그것이 우리 집 잔칫날이었다.

보람이라면, 젊을 때 우리 집에서 밥을 먹던 총각이 십몇 년 만에 아들을 데리고 온 일이다. 아버지가 총각 때 여기서 밥을 먹었다고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내가 밥만 판 게 아니구나 싶었다. 사람들 인생의 어느 한때에 내 국밥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국물이 유난히 잘 나왔다.

2015년에 간판을 내렸다. 무릎이 더는 버티지 못했다. 인부들이 사다리를 놓고 간판을 떼는 것을 나는 밑에서 보고 있었다. 삼십 년 걸려 있던 자리에 벽이 허옇게 드러났다. 거기만 색이 달랐다.

그때 울었다. 시원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먼저 울었다. 그이가 옆에 서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등을 한 번 두드렸다.

돈에 대해서는 이렇게 배웠다. 없어도 살아진다. 그런데 없으면 사람이 초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아끼되 남 앞에서 궁색하게는 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돈은 벌 때보다 안 쓸 때 모인다. 그것을 아는 데 참 오래 걸렸다.

젊은 사람들한테 일에 대해 해 줄 말이 있다면 하나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기억한다. 처음에는 서툴러도 삼 년만 같은 걸 하면 손이 알아서 움직인다. 그때부터가 진짜다. 요즘은 삼 개월 만에 이건 내 길이 아니라고들 하던데, 손이 기억할 시간은 줘야 한다.

가게를 열기 전에 나는 국밥집 여러 곳을 다녔다. 손님인 척 앉아서 국을 먹고 주방을 봤다. 어떻게 담는지, 몇 명이 일하는지, 반찬은 몇 가지인지. 그때는 그런 걸 배울 데가 없으니 눈으로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어려웠던 게 육수 맛을 잡는 것이었다. 처음 석 달은 매일 맛이 달랐다. 뼈를 얼마나 넣는지, 몇 시간을 끓이는지, 언제 불을 줄이는지를 손으로 익히는 데 일 년이 걸렸다. 저울로 재도 그날 뼈에 따라 달라진다.

단골이 생기기 시작한 게 이 년쯤 지나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사람이 하나둘 늘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앉기 전에 물부터 떠 놓게 된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고, 얼굴은 몰라도 뒷모습은 안다.

택시 기사들이 많이 왔다. 새벽에도 오고 밤에도 왔다. 그 사람들은 밥을 빨리 먹는다. 십 분이면 일어선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 것은 미리 담아 놓았다. 앉으면 바로 나가게.

공사판 사람들도 왔다. 흙 묻은 신발로 들어오는 걸 싫어하는 집도 있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 그이도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대신 바닥을 자주 닦았다.

한 번은 돈이 없다고 하는 손님이 있었다. 다 먹고 나서 주머니를 뒤지는데 없었다. 그냥 가시라고 했다. 다음에 오시면 되지요, 했더니 얼굴이 벌게져서 나갔다. 일주일 뒤에 와서 돈을 놓고 갔다. 그 뒤로 십 년을 단골이었다.

아이들이 가게에 오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미가 앞치마 두르고 일하는 걸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영이가 중학교 때부터 주말에 와서 거들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왔다.

성진이는 대학 다니면서 방학에 배달을 했다. 그때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나는 매번 마음을 졸였다. 사고 나면 어쩌나 싶어서.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가게에서 제일 바쁜 시간은 점심때였다.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 한 시간에 하루 벌이의 절반이 나왔다. 그 한 시간은 아무 생각이 없다. 손만 움직인다. 그러다 한 시가 넘으면 갑자기 조용해지고 그때 다리가 아파 온다.

명절 전날은 문을 늦게까지 열었다. 고향에 못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와서 국밥에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 그런 손님한테는 반찬을 좀 더 놓아 드렸다. 말은 안 걸었다. 말을 걸면 더 서러운 법이다.

삼십 년 동안 가게 문을 닫은 날은 명절 사흘과 아이들 입학식 몇 번, 그리고 그이 아버님 장례 때뿐이다. 몸이 아파서 쉰 적은 없다. 아프면 아픈 대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미련한 짓이었다.

다시 직업을 고를 수 있다면 그래도 밥집을 할 것 같다. 사람이 밥 먹는 걸 보는 게 좋다. 다만 이번에는 좀 작게, 자리에 앉아서 하는 걸로 하고 싶다. 손님 얼굴을 좀 더 보면서. 삼십 년 동안 나는 늘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요즘의 나

요즘도 여섯 시면 눈이 떠진다. 삼십 년을 그 시간에 일어났으니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다. 일어날 일이 없는데도 눈이 떠진다. 한동안은 그게 괴로웠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일어나면 동네를 한 바퀴 걷는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 나가면 작은 공원이 있고 거기 운동기구가 몇 개 있다. 같은 시간에 나오는 노인들이 있어서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모른다. 목례만 하고 지나간다.

돌아와서 라디오를 켜 놓고 아침을 먹는다. 텔레비전보다 라디오가 좋다. 소리만 나는 게 덜 외롭다. 텔레비전은 보고 있어야 하는데 라디오는 그냥 틀어 놓으면 되니까.

낮에는 텃밭에 나간다. 아파트 뒤에 조그맣게 분양받은 자리인데 상추하고 고추, 깻잎을 심었다. 상추가 제일 잘 자란다. 뜯어도 뜯어도 또 나온다. 혼자 먹기에는 많아서 이웃에 나눠 준다.

저녁에는 드라마를 본다. 요즘 것들은 이야기가 빨라서 따라가기가 힘들다. 그래도 본다. 조용한 것이 심심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무릎이 좋지 않아 오래는 못 걷는다. 젊을 때 하도 서 있어서 다리가 상했다. 병원에서는 연골이 닳았다고 한다. 약은 혈압약 하나를 먹는다. 그래도 아직 내 발로 장에 가니 다행이다 싶다.

그이는 2018년에 갔다. 아침에 자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흔들어도 안 일어나길래 그제야 알았다. 그 전날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먼저 들어가 잤을 뿐이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이 신발이 현관에 그대로 있었다. 그걸 못 치웠다. 한 달을 그냥 뒀다. 미영이가 와서 치워 주었다.

요즘도 밥상을 두 개 차릴 뻔한 날이 있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혼자 밥을 먹은 지 팔 년이 되었는데도 그것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람이 없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데, 없다는 걸 몸이 받아들이는 데는 오래 걸린다.

어머니 생각도 자주 난다. 그 몸으로 밭일에 물질까지 하시면서 우리 셋을 키우셨다. 내가 부산에 간다고 했을 때도 잡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잡고 싶으셨을 것이다.

1991년에 가셨는데 나는 그때 가게가 바빠서 임종을 보지 못했다. 연락을 받고 갔을 때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것이 평생 걸린다. 사람은 결국 못 한 것만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초하루마다 절에 다녔다. 대단한 신심은 아니었다. 그저 거기에 가면 마음이 놓였다. 빚에 쫓기던 시절에 법당에 앉아 있으면 그 한 시간만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전화도 없고 손님도 없고 아이들도 없었다.

그 한 시간으로 한 달을 버텼다. 부처님이 뭘 해 주신 게 아니라 그냥 앉아 있을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한테는 그런 자리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

살아보니 인생은 국솥 같다. 처음에는 뼈하고 물뿐이라 아무 맛이 없다. 몇 시간을 끓여야 뽀얘진다. 중간에 불을 끄면 그냥 물이다.

나는 그것을 삼십 년 봤다. 사람도 그렇다. 오래 끓인 사람은 얼굴만 봐도 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겪었다는 건 안다.

힘든 시절을 지나는 사람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하나뿐이다. 오늘만 살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나는 빚이 제일 많던 해에 달력을 보지 않았다. 한 달 뒤를 생각하면 숨이 쉬어지지 않으니까. 그냥 오늘 국을 끓이고 오늘 문을 열고 오늘 닫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 해가 갔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견딘 게 아니라 그냥 하루씩 살았을 뿐이라는 걸.

잘한 선택을 꼽으라면 셋이다. 열아홉에 부산으로 나온 것, 그이와 결혼한 것, 그리고 가게를 연 것. 셋 다 그때는 무서웠다.

무서운데도 한 것이 결국 잘한 것이 되었다. 무섭지 않은 선택은 별로 남는 게 없더라. 안전한 쪽으로만 갔으면 나는 아직 남해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제일 즐거운 것은 손주들 얼굴을 보는 일이다. 서연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하는데 절반은 알아듣지 못한다. 요즘 아이들 말이 빠르고 모르는 말이 많다. 그래도 그 얼굴을 보는 것이 좋다.

하준이는 이제 커서 말수가 줄었다. 사춘기라고 한다. 그래도 얼굴 한번 비춰 주면 그날은 기분이 좋다. 지우는 다 커서 회사에 다닌다. 가끔 전화를 해서 할머니 뭐 해, 하고 묻는다.

남해에 한번 가보고 싶다. 그 죽방렴이 아직 있는지. 인터넷에 나온다고 하는데 나는 볼 줄을 모른다. 혼자 가기는 그렇고 누가 같이 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못 하고 있다. 바쁜 애들한테 짐이 될까 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해 주었으면 하느냐고 묻는다면, 밥 잘 먹이던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것이면 된다. 대단한 일을 한 사람도 아니고 이름을 남길 사람도 아니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나간 사람들이 그날 배가 불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미영이, 성진이, 미란이한테는 이 말을 하고 싶다. 엄마가 가게를 한다고 너희 어릴 때를 많이 놓쳤다. 소풍날 김밥도 못 싸 줬고 학교 행사도 거의 못 갔다. 그것은 미안하다.

그래도 너희 셋이 서로 챙기는 것을 보면 엄마가 아주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싶다.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 살림이나 잘 챙겨라. 그것이 효도다.

나에게도 한마디 해 주고 싶다. 잘했다, 순자야. 열아홉에 보따리 하나 들고 나와서 여기까지 왔으면 됐다. 남들만큼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했어도 남에게 손을 벌린 적은 없다. 아이 셋을 다 키워 냈다. 그만하면 됐다.

내일도 여섯 시면 눈이 떠질 것이다. 동네를 한 바퀴 걷고 와서 라디오를 켤 것이다. 상추가 제법 올라왔으니 며칠 뒤면 뜯어 먹어도 되겠다. 주말에는 서연이가 온다고 했다.

아침 산책길에 같은 시간에 나오는 할머니가 한 분 있다. 몇 년째 마주치는데 인사만 하고 지나간다. 언젠가 한번 말을 걸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나이가 되면 새로 사람을 사귀는 게 어렵다.

경로당에 나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한번 가 봤는데 화투를 치고 있었다. 나는 화투를 칠 줄 모른다. 앉아만 있다가 왔다. 그 뒤로 안 간다.

텔레비전에서 옛날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른다. 이미자 씨 노래가 나오면 특히 그렇다. 동백아가씨. 상회에서 일할 때 라디오로 듣던 노래다. 가사를 아직 다 안다. 요즘 노래는 한 소절도 못 외운다.

딸들이 여행을 가자고 하는데 나는 자꾸 미룬다. 무릎도 그렇고, 가서 짐이 될까 봐서다. 그런데 사실은 낯선 데가 무섭다. 젊을 때는 안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 아는 자리만 편하다.

그이 제사를 지낸다. 미영이가 오고 성진이가 오고 미란이가 온다. 손주들도 온다. 그날은 집이 시끄럽다. 나는 그날이 제일 좋다. 슬픈 날인데 제일 좋다는 게 이상하지만 그렇다.

제사상에 그이가 좋아하던 걸 올린다. 돼지고기 수육하고 막걸리. 국밥은 안 올린다. 그이가 평생 우리 집 국밥을 먹었으니 저승에서는 다른 걸 드시라고.

요즘은 텔레비전에서 옛날 사진을 복원해 준다는 것도 보고, 목소리를 흉내 낸다는 것도 봤다. 세상이 그렇게까지 됐다. 나는 그런 게 좀 무섭다. 사람이 없어졌으면 없어진 대로 두는 게 맞지 않나 싶다.

그래도 사진은 자주 본다. 앨범이 세 권 있다. 첫 권은 흑백이고 뒤로 갈수록 색이 들어온다. 아이들이 자라는 게 장마다 보인다. 그러다 어느 페이지부터 내가 늙어 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장을 봐 오면 예전에는 한 번에 들었는데 이제는 두 번에 나눠 든다. 그게 서럽다기보다 그냥 그렇구나 싶다. 어머니도 이랬겠구나 싶고.

아직 이루고 싶은 것을 꼽으라면 서연이 시집가는 걸 보는 것이다. 제일 어린 손주니까 그때까지는 있어야겠다. 그리고 남해에 한 번. 두 가지다.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가끔 내가 무슨 이야기를 남기고 가나 싶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이름을 남길 일도 없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중에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물으면 대답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게 좀 아쉬웠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남긴다.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잘 살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런 사람이 여기 살았다고, 그것만 남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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