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 견본 · 전문 무료 공개

일 년의 반

강명순 · 1952년 통영에서

이 책은 견본입니다. 강명순 님은 가상의 인물이며, 실제 고객의 기록이 아닙니다. 나이테로 만들면 어떤 책이 나오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기 위해 같은 방식으로 집필·조판한 것입니다. 실제 책은 A5 양장(하드커버) 3권으로 제작됩니다 (2,200,000원).
차례 굴 껍데기 깨는 소리열넷에 부산으로일 년의 반뿌리를 내리라고칼 가는 소리두 사람 앉는 자리

모두 6장 · 29,479자 · 삽화 30장

성근이와 미숙이에게, 그리고 우리 손주 셋에게 이 이야기를 남긴다.

이 책은 강명순 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옮긴 것입니다. 1952년 통영 바닷가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열넷에 부산으로 나와 봉제공장 시다로 앉았고, 스물여덟에 자갈치에 좌판 하나를 얻어 삼십 년을 생선과 함께 살았습니다. 남편은 원양어선을 탔고, 그래서 일 년의 반은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적힌 일은 모두 본인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안의 마음과 장면은 그 말씀에 기대어 세웠습니다.

굴 껍데기 깨는 소리

나는 통영 바닷가 마을에서 났어. 집 앞이 바로 갯벌이고 거기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굴밭이라, 물이 빠지는 시각이 되면 온 동네 아지매들이 대야를 이고 하나둘 갯벌로 내려가는데 조금 있으면 그 소리가 집까지 올라왔어. 딱, 딱, 딱 하고 굴 껍데기 깨지는 소리가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나기 시작하면 그게 우리 동네 시계였어.

아침에 그 소리가 나면 하루가 시작된 거고, 소리가 뜸해지면서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가 달라지면 이제 물이 들어올 때가 됐구나 싶어서 나는 아궁이 앞으로 갔지. 시계가 있는 집이 없었으니까 다들 그 소리로 살았어. 비가 오는 날은 그 소리가 물에 눌려서 둔하게 들리는데, 그런 날은 어머니가 평소보다 늦게 들어오셨어.

그 동네는 집이 죄다 낮고 지붕이 서로 붙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에도 처마 밑으로만 걸으면 옆집까지 안 젖고 갈 수 있었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좋았어. 누구 집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누가 아픈지도 다 알고 어느 집에서 오늘 뭘 끓이는지까지 냄새로 아는 동네라, 숨을 데가 없는 대신 굶는 집도 없었어.

우리 집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마루 밑이야. 거기다 굴 까는 조새하고 장갑을 넣어놨는데, 어머니가 일 나가시면서 거기서 꺼내 가시고 들어오시면 다시 거기다 넣으시고 하셨으니까, 나는 마당에 들어서면서 마루 밑을 한 번 들여다보면 어머니가 지금 집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았어. 조새가 없으면 나가신 거고.

무릎을 꿇고 손으로 마루 밑 어둠을 더듬으면 축축한 흙냄새하고 짠 냄새가 같이 올라오는데, 조새 자루가 손에 닿는 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한참을 있었어.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있는 날이 며칠 없었으니까.

아침에 어머니가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마루 밑으로 팔을 넣어 조새를 꺼내시는 걸 나는 부엌 문지방에서 보고 있었는데, 그걸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으시면 그날은 저녁까지 어머니가 없는 날이라는 뜻이라 나는 어머니가 마당을 나가시기 전에 미리 명수를 업었어. 업고 나서야 어머니가 뒤를 한 번 돌아보셨어.

아버지는 배를 타셨어. 근해라 며칠씩 나갔다 오시고 먼바다까지는 안 가셨는데, 말이 없으신 분이라 들어오셔도 어디까지 갔다 왔다는 얘기 한마디를 안 하시고 대신 꼭 뭘 사 오셨어. 사탕이든 뭐든 주머니에서 나오는데, 그걸 다섯으로 나누는 건 늘 내 몫이었지.

마루에 앉아서 사탕을 다섯 무더기로 나누어 놓고 나면 동생들이 우르르 제 것을 집어 가는데, 나는 내 무더기에서 하나를 더 떼어 제일 어린 애 손에 쥐여주고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버지는 그걸 보시면서도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담배만 태우시다가, 다음에 들어오실 때 사탕을 조금 더 많이 사 오셨어.

어머니는 굴을 까셨는데 손이 성한 날이 하루도 없었어.
어머니는 굴을 까셨는데 손이 성한 날이 하루도 없었어.

어머니는 굴을 까셨는데 손이 성한 날이 하루도 없었어. 굴 껍데기가 칼날 같거든.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지는데 그 손으로 또 까고 또 까야 되니까, 반창고를 감고 까다가 그 반창고가 물에 불어서 너덜너덜해지면 떼고 새로 감고 다시 까고 그러셨어.

저녁 밥상에서 그 손이 숟가락을 쥐는 걸 보면 손가락 마디마다 흰 것이 감겨 있어서,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자꾸 그 손만 봤어. 어머니는 내가 보는 걸 아시면 숟가락 쥔 손을 슬그머니 상 밑으로 내리셨어. 그래서 나중에는 안 보는 척하고 봤지.

내가 장녀라 밑에 넷을 다 업고 키웠어. 명수가 두 살 아래고 명자가 다섯 살 아래, 명호가 여덟 살 아래, 막내 명희는 나하고 열한 살 차이야. 넷을 다 업어봤으니까 등이 언제 무거워지는지 나는 알아. 애가 잠들면 그때부터 갑자기 무거워지거든.

포대기 매듭을 앞으로 돌려 묶고 나면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어.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도 업고 있었고 물을 길으러 갈 때도 업고 갔고 갯벌에 나갈 때도 업고 나갔는데, 등에서 애가 자다가 오줌을 싸면 등허리가 뜨듯해졌다가 바람에 식으면서 시렸어. 그게 겨울이면 옷이 마를 때까지 그냥 있었어.

명희는 눈을 뜨고 처음 본 얼굴이 아마 내 얼굴이었을 거야.
명희는 눈을 뜨고 처음 본 얼굴이 아마 내 얼굴이었을 거야.

명희는 눈을 뜨고 처음 본 얼굴이 아마 내 얼굴이었을 거야. 그래서 그랬는지 그 아이는 나를 엄마인 줄 알았어. 다섯 살 될 때까지 나를 보고 「엄마」 했다니까.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들으신 날이 있었어. 굴밭에서 막 들어오셔서 마루에 대야를 내려놓으시는 참이었는데 명희가 내 다리를 붙들고 「엄마」 하는데,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라. 대야를 마저 내려놓으시고 손을 씻으시고 저녁을 안치시고, 그날 저녁 내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나는 그때 어머니 얼굴을 아직도 기억해.

그 얼굴이 화가 난 얼굴이었으면 나도 잊었을 텐데, 화도 아니고 서운함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라 지금까지 남았어. 나중에 내가 애를 낳고 자갈치에 나가면서 성근이 미숙이를 옆집 아지매한테 맡겨놓고 새벽 네 시에 나가 밤 아홉 시에 들어오게 됐을 때, 그리고 다 큰 미숙이가 웃으면서 「엄마 냄새보다 아지매 냄새가 익숙했다」 하는 걸 듣게 됐을 때, 그제야 그 얼굴이 무슨 얼굴이었는지 알겠더라.

학교 가던 첫날에도 명수를 업고 갔어. 어머니가 굴밭에 나가셔야 되니까 애를 맡길 데가 없었고, 나는 업고 가는 게 당연한 줄 알았지 그게 이상한 건 줄도 몰랐어. 운동장을 지나서 교실을 찾아 들어갔는데 앉을 자리가 있는데도 나는 안 앉았어. 앉으면 등에 업힌 애가 눌리니까 뒤에 서서 들었어.

선생님은 뒤에 서 있는 나를 보시고도 뭐라고 안 하셨어. 그 시절엔 그런 아이가 나 말고도 있어서 교실 뒤에 서 있는 애가 늘 두엇은 됐거든. 이름을 부르실 때만 뒤를 보시고 나머지 시간에는 칠판만 보셨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고마웠어.

애가 울면 나는 소리 안 나게 문을 열고 나가서 복도 끝까지 가서 흔들어 달래다가, 울음이 그치면 다시 들어와서 아까 서 있던 그 자리에 섰어. 하루에 서너 번씩 그러고 나면 수업 절반은 못 들었는데 그래도 글자는 배웠어. 칠판에 쓰인 걸 서서 눈으로 따라 그렸으니까.

그렇게 서서 배운 글자로 나는 초등학교를 마쳤고, 그 뒤로는 학교 문 안에 다시 못 들어갔어. 지금도 글씨를 쓰면 획이 흔들리는데, 이 나이에 복지관에서 서예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앉아서 글자를 써봤어.

어릴 때 무슨 놀이를 했냐고 하면 놀 시간이 어디 있었나 싶은데, 굳이 꼽으라면 물 빠진 갯벌에서 게 잡던 거야. 그것도 놀이라기보다 반찬이었지. 동생들 데리고 나가서 돌을 들추면 게가 옆으로 달아나는데 그걸 손바닥으로 덮쳐서 잡아 오면 어머니가 된장에 넣고 끓여주셨고, 잡을 때는 놀이였다가 대야를 들고 집으로 걸어 들어올 때는 일이 되는데 그 둘이 갈라지지가 않았어.

어머니가 그날 깐 굴 중에 깨진 것만 앞치마에 싸서 갖고 오셨어.
어머니가 그날 깐 굴 중에 깨진 것만 앞치마에 싸서 갖고 오셨어.

그중에 제일 맛있게 먹은 건 굴국이야. 어머니가 그날 깐 굴 중에 깨진 것만 앞치마에 싸서 갖고 오셨어. 성한 건 다 팔아야 되니까 우리 입에 들어오는 건 늘 깨진 거였는데, 그 깨진 굴로 국을 끓이면 그게 더 맛있었어. 참말이야.

껍데기 조각이 씹히기도 하고 국물이 뿌옇게 흐려지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게 더 맛있었어. 다섯이 상에 붙어 앉아서 그릇을 들고 마시면 김이 올라와서 서로 얼굴이 안 보였는데, 어머니는 그 시간에 늘 부뚜막에 서 계셨어. 앉으시라고 해도 안 앉으셨어.

요새 파는 굴은 그 맛이 안 나. 물이 다르나 싶기도 하고 내가 늙어서 혀가 달라졌나 싶기도 한데, 나중에 우리 애들 데리고 일 년에 한 번 통영 외갓집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그 굴국을 끓여주셨거든. 애들이 그걸 참 잘 먹었어. 내가 어릴 때 먹던 그 국을.

한 번은 학교를 안 가고 갯벌에 갔다가 걸렸어. 명수 신발이 떠내려가서 그거 찾으러 간 거였어. 그 시절에 신발 한 짝이 없어지면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 아이가 겨울을 맨발로 나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책보를 처마 밑에 던져놓고 갯벌로 내려갔어.

물이 빠질 때 신발이 떠내려가면 어디쯤 뻘에 걸려 있는 게 보통이라 나는 그날 종일 갯벌을 훑고 다녔어. 무릎까지 빠지는 데를 지나면서 굴 껍데기에 발바닥이 두어 군데 갈라졌는데 그건 나중에 집에 와서야 알았고, 해가 기울도록 못 찾고 결국 빈손으로 들어왔어.

어머니는 그걸 안 물어보시고 회초리를 드셨어. 왜 학교를 안 갔냐고도 안 물으시고 어디를 갔다 왔냐고도 안 물으시고 그냥 종아리를 걷으라고만 하셨어. 나는 신발 얘기를 할까 하다가 안 했어. 신발이 떠내려간 것도 내가 애를 잘 못 봐서 그리 된 건데 그 얘기를 하면 변명이 되니까.

그런데 몇 대 때리시다가 갑자기 그만두시더니 회초리를 마루에 놓고 나가시더라. 나는 종아리를 걷은 채로 한참 서 있었어. 동생들은 방 안에서 숨도 안 쉬고 있고 마당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나는 어머니가 다시 들어오셔서 마저 때리시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어.

한참을 기다려도 안 들어오셔서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는데, 마루 끝에 앉아서 울고 계셨어. 등을 돌리고 앉으셔서 소리는 하나도 안 내시는데 어깨가 자꾸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보였어. 나는 그게 맞은 거보다 아팠어.

그 밤에 내가 무서운 거보다 동생들 앞에서 안 무서운 척하는 게 더 힘들었어.
그 밤에 내가 무서운 거보다 동생들 앞에서 안 무서운 척하는 게 더 힘들었어.

어릴 때 제일 무서웠던 건 태풍이 오던 밤에 아버지 배가 안 들어온 일이야. 저녁부터 바람이 이상하더니 밤이 되니까 문짝이 흔들려서 나무를 대고 못을 쳤어. 지붕에서 뭐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마당에 있던 함지박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나는데, 나가서 잡아 올 엄두가 안 났어.

어머니가 그 소리를 다 듣고 앉아 계시다가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으시더라. 나는 어디 가시냐고 안 물었어. 물어볼 것도 없이 어디 가시는지 아니까 나는 그냥 명희를 받아 안았고, 어머니는 문을 열고 나가시면서 뒤도 안 돌아보셨어.

방파제까지 나가서 서 계셨어. 나는 동생들 넷을 데리고 집에 있었지. 문틈으로 내다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빗줄기가 옆으로 지나가는 것만 보이는데, 그 어둠 어디쯤에 어머니가 서 계신다는 걸 아니까 그 문틈에서 눈을 못 떼겠더라.

명희가 갓난쟁이라 그날 밤새 울었어. 배가 고파서 우는 건지 무서워서 우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업었다가 눕혔다가 물을 먹였다가 하는데도 그치질 않고, 명수하고 명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만 쳐다보고 있고, 명호는 자다 깨서 어머니를 찾다가 다시 잠들었어.

그 밤에 내가 무서운 것보다 동생들 앞에서 안 무서운 척하는 게 더 힘들었어. 무서우면 무섭다고 하면 되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웃는 얼굴을 만들어놓고 명희를 흔들면서 등을 두드렸는데, 손이 떨리는 건 등을 두드리는 손이라 애가 모를 줄 알았어. 문틈으로 바람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자꾸 속으로 숫자를 셌어. 백까지 세고 또 백까지 세고 그러다 보면 아침이 올 것 같았거든.

새벽에 배가 들어왔어. 바람이 자기 시작하고 하늘이 희끄무레해질 무렵에 마당에서 발소리가 나서 문을 여니까 어머니가 먼저 들어오시는데, 치맛자락이 물을 먹어서 발목에 척척 감기는 채로 들어오셔서 아무 말도 없이 명희를 받아 안으셨어. 아버지는 그 뒤에 서 계셨어. 그날 아침에도 어머니는 젖은 옷 그대로 밥부터 안치셨어.

설에 아버지가 배에서 돌아오시면 그게 우리 집 명절이었어. 날짜하고는 상관없이 아버지가 마당에 들어서시는 날이 설이었지. 동생들이 우르르 달려나가서 다리에 매달리고 주머니를 뒤지고 하는데, 나는 안 나갔어.

왜 안 나갔는지 지금도 모르겠어. 장녀라 그랬나.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발이 안 떨어져서, 부엌에 앉아 상을 차리면서 마당에서 나는 소리만 들었어. 명자가 웃는 소리하고 명호가 우는 소리하고 아버지가 헛기침하시는 소리가 다 따로따로 들렸어.

검정 고무신이 커서 자꾸 벗겨졌어.
검정 고무신이 커서 자꾸 벗겨졌어.

아버지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오실 때까지 나는 부엌에 있었고, 상을 들고 들어가면서야 아버지 얼굴을 봤어. 그때마다 얼굴이 조금씩 더 검어져 있었어.

그 시절 내 꿈은 간호사였어. 우리 동네에 보건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간호사 언니가 하얀 옷을 입고 있었어.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을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어. 우리 동네 사람들 옷은 다 물이 빠져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모를 색이었으니까.

동생을 업고 갔을 때였어. 명호가 열이 나서 업고 갔는데, 그 언니가 애 이마를 짚어보고 나서 내 손을 잡아줬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손을 잡아준 것만 기억이 나.

그 손이 그렇게 부드러웠어. 내 손은 그때 벌써 갯벌 냄새가 났고 손톱 밑에 낀 뻘이 아무리 씻어도 안 빠졌는데, 그 언니는 그 손을 놓지 않고 한참을 잡고 있었어. 집에 오는 길에 나는 내 손을 자꾸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봤어.

그 뒤로 한동안 나는 하얀 옷 생각을 했어. 흰 것이라고는 어머니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밖에 없는 집에서 하얀 옷을 입고 남의 이마를 짚는 사람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자꾸 그려보다가, 열 살이 넘어가면서는 그 생각을 안 했어. 요새 복지관에서 어르신들 부축해드릴 때 그 생각이 다시 나더라.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이 있어. 「밥 굶고 댕기면 복 달아난다.」 굴을 까시다가도 하시고 우리를 밖에 내보내면서도 하시고, 아버지 배가 안 들어온 그 밤이 지나간 아침에도 솥에 물을 부으면서 그 말을 하셨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커서 나중에 우리 애들한테도 그 말만 했어. 편지 끝에 적은 것도 그거 하나야. 「밥 굶지 말고 댕기라.」

열네 살에 나는 부산으로 나갔어.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밑에 동생이 넷이니까 내가 벌어야 됐고, 그 나이에 무섭다는 생각도 안 했어. 부산역에 내렸는데 사람이 그렇게 많더라.

지금도 새벽 네 시 반이면 눈이 떠져. 옥상에 올라가서 깻잎에 물을 주다가 바람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 보는 버릇이 있는데, 남쪽에서 물비린내가 실려 오는 날이면 통영 그 마루 밑이 떠올라. 무릎을 꿇고 조새가 있는지 없는지 들여다보던 자리.

열넷에 부산으로

열넷에 부산으로 왔어. 초등학교 졸업식을 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어무이가 싸주신 보따리 하나를 안고 나섰는데, 부산역에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더라. 통영에서는 골목을 걸으면 누구 집 아이인지 서로 다 아는 얼굴들뿐이었는데 여기서는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역 앞에 한참을 서서 이 사람들이 다 어디로 이렇게 가나 하고 그것만 보고 있었어. 무섭다는 생각은 안 했어.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나 싶은데 그 나이에는 무서운 것하고 해야 하는 것을 견주어 볼 줄을 몰랐고, 밑에 동생이 넷이나 있으니 누가 벌어야 하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지.

그 시절에는 다들 어디론가 가고 있었어. 통영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는 사람들 틈에 나도 하나로 끼어 있었던 거고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우리가 갈 데가 있어서 간 게 아니라 있을 데가 없어서 갔다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어. 지금은 다들 어디 안 가고 앉아 있는데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고, 다만 그 시절에 부산역 앞에 서 있던 사람들 얼굴에는 다들 두고 온 데가 하나씩 있었다는 것만 알아.

들어간 데가 봉제공장이었어. 시다로 들어갔으니 처음에는 실밥 뜯는 일부터 했는데, 다 박힌 옷을 받아서 시접에 붙은 실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다음 사람한테 넘기는 일이라 배울 것도 없는 대신 잠깐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 앞에서 미싱이 쉬지 않고 돌아가니까 내가 한 벌만 늦어도 옷이 쌓이고, 쌓인 옷을 누가 대신 치워주는 법은 없었어. 그 자리에서는 늦는 것이 제일 큰 잘못이었고, 나는 통영에서 굴 까는 손들만 보고 자랐지 이렇게 여러 사람의 손이 한 줄로 이어져서 하나가 늦으면 다 늦어지는 일은 처음 봤어.

처음 며칠은 내 앞에만 옷이 산처럼 쌓였어. 손이 느린 게 눈에 보이니까 밥 먹으라고 해도 자리에 앉아서 그것부터 치우고 먹었고, 그러다 보면 다들 일어난 뒤에 혼자 밥을 먹게 되더라. 열네 살이 무슨 힘이 있었겠나 싶은데 그때는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안 쉬는 걸로 했어. 한 달쯤 지나니까 내 앞이 비었어. 내 앞이 빈 걸 보고 나서야 나는 여기서 밥은 먹고 살겠구나 했고, 그날 저녁에 방에 들어와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이 손이 앞으로 밑에 넷을 먹여야 하는 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똑똑히 생각해봤어.

하루에 열대여섯 시간을 앉아 있었어. 아침에 앉으면 밥 먹을 때 한 번 일어나고 그다음에는 밤까지 그 자리였는데, 전등이 낮이나 밤이나 똑같이 켜져 있어서 어느 날은 밖이 밝은지 어두운지도 모르고 나왔어. 공장 안에는 실밥에서 나오는 먼지가 늘 떠 있어서 코를 풀면 검은 것이 나왔고, 그런 날에도 다음 날 아침이면 또 그 자리에 앉았어. 그렇게 앉아 있으면 하루가 가는 게 아니라 하루가 나를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어.

통영에서 갯벌 냄새가 나던 손인데 이제는 기름 냄새가 나더라.
통영에서 갯벌 냄새가 나던 손인데 이제는 기름 냄새가 나더라.

손이 제일 먼저 변하더라. 실을 뜯다 보면 손톱 밑이 자꾸 갈라져서 처음 몇 달은 물만 닿아도 쓰렸는데, 반년쯤 지나니까 손끝에 굳은살이 앉아서 아프지도 않고 그 대신 감각이 좀 없어졌어. 밤에 방에 들어와서 그 손을 들여다본 적이 있어. 통영에서 갯벌 냄새가 나던 손인데 이제는 기름 냄새가 나더라.

첫 월급을 받던 날을 기억해. 봉투가 생각보다 얇아서 잠깐 들여다보다가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는데, 그날 저녁에 그걸 꺼내 세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통영에 부쳤어. 우체국 창구에 봉투째 밀어 넣으면서 내가 쓸 것은 하나도 안 뺐어. 아니, 하나 뺐어. 명자 운동화.

명자가 신발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누가 지나가는 소리로 전해줘서 그게 내내 걸렸어. 발 크기를 모르니까 가게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섯 살 아래니까 이만하겠지 하고 손으로 재보고 골랐는데, 그게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는 지금도 물어보지를 못했어. 그 운동화를 종이에 싸서 들고 나오는데 그날은 걸음이 좀 가볍더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번 돈으로 뭘 샀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정작 산 것은 내 것이 아니었어.

그다음 달부터는 봉투를 뜯지도 않고 부쳤어. 그게 습관이 되니까 나중에는 이게 내 돈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 안 들었고, 어쩌다 통영에서 잘 받았다는 기별이 오면 그날 하루가 괜찮았어. 기별이 안 오는 달도 있었는데, 그런 달에는 부친 게 어디쯤 가 있나 하고 자다가 눈을 뜨기도 했어. 열다섯 열여섯 그 나이에 나는 달마다 그 걱정을 하면서 살았어.

잠은 공장 아이들하고 한방에서 잤어. 좁은 방에 여럿이 나란히 누우면 몸을 돌리는 것도 서로 눈치를 봐야 했고 누가 밤에 우는 소리가 나면 다들 안 들리는 척을 했는데, 그래도 그 방이 있어서 견뎠어. 다들 나 같은 아이들이라 밑에 동생이 있거나 위에 병든 사람이 있거나 했지, 벌어서 자기한테 쓰는 아이는 그 방에 하나도 없었어.

첫 월급을 봉투째 우체국 창구에 밀어 넣었어.
첫 월급을 봉투째 우체국 창구에 밀어 넣었어.

일요일에는 같이 광복동을 걸었어. 돈이 없으니까 걷는 것이 노는 것이었고, 우리는 아무것도 안 사면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갔다가 또 돌아왔어. 유리창 안에 걸린 옷을 보면서 저건 우리가 뜯던 거하고 비슷하다 어떻다 하는 소리를 하다가, 정작 그 문은 아무도 안 열었어.

빵집 앞에서는 다들 걸음이 느려졌어. 유리창 안에 빵이 쌓여 있고 문이 열릴 때마다 냄새가 훅 나오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냄새만 맡고 왔어. 누가 먼저 가자고 하면 그때 갔고, 아무도 먹고 싶다는 말은 안 했어.

그중에 순임이라고 있었어. 나보다 먼저 들어와 있던 아이라 처음에 이것저것 알려준 게 그 아이였는데, 지금도 연락해. 일 년에 두어 번 만나서 밥을 먹어. 그 긴 세월을 이어온 사이인데 만나면 하는 얘기는 여전히 그 방하고 그 광복동 얘기야. 요새 사는 얘기를 한참 하다가도 끝에 가면 꼭 그때로 돌아가서, 그 방에서 누가 코를 골았고 누가 밤에 울었고 하는 소리를 앉은 자리에서 또 하고 또 해.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나왔을 때 공장에서 다들 따라 불렀어. 미싱 소리 위로 누가 한 소절을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받아서 부르는데, 나는 그 노래가 슬펐어. 우리 아부지가 배를 타셨으니까. 돌아온다는 노래를 배 타는 사람 식구는 그렇게 못 들어. 남들은 그 노래를 부르면서 신이 나는데 나는 꼭 그 대목에서 손이 멈춰서, 나중에는 따라 부르지 않고 듣기만 했어. 돌아오라는 말은 아직 안 돌아왔다는 말이잖아.

공장 옆 건물에 인쇄소가 있었어. 거기 총각이 하나 있었는데 점심때 계단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했지. 인사만 하는데도 계단을 올라갈 때 오늘은 있나 없나 하고 보게 되더라. 잉크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어. 나는 기름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고.

한 번은 비가 왔어. 퇴근길에 우산이 없어서 처마 밑에 서 있는데 그 사람이 우산을 펴 들고 같이 가자고 해서 정류장까지 갔는데, 어깨가 닿을까 봐 나는 자꾸 바깥쪽으로 걸어서 한쪽 팔이 다 젖었어. 그 사람도 그걸 봤을 텐데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했어. 정류장에서 헤어질 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게 다야.

편지 한 장 없었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고, 계단에서 한동안 위를 보다가 그것도 안 하게 됐어.
편지 한 장 없었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고, 계단에서 한동안 위를 보다가 그것도 안 하게 됐어.

그해 겨울에 그 사람이 군대를 갔어. 그걸로 끝이야. 편지 한 장 없었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고, 계단에서 한동안 위를 보다가 그것도 안 하게 됐어. 그 시절에는 사람이 하나 없어져도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볼 데가 따로 없었으니까, 없어지면 그냥 없어진 대로 두고 다음 날 또 그 계단을 올라갔어.

그 시절에 내가 지갑에 넣고 다닌 사진이 하나 있어. 동생 넷하고 찍은 흑백사진인데 명희 돌 때 찍은 거라, 내가 명희를 안고 있고 옆에 셋이 나란히 서 있어. 그 사진에서 내 얼굴은 아직 애 얼굴이야. 그런데 표정은 애 표정이 아니더라. 열여섯인가 그랬을 텐데 지금 보면 그 나이로는 안 보여. 공장에서 힘든 날에는 그 사진을 꺼내 봤는데, 힘이 나서 본 게 아니고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봤어. 지금은 액자에 넣어놨는데 가끔 그 앞에 서서 그 표정을 봐.

그 아한테 한마디 할 수 있다면 니도 좀 챙기라고 하고 싶어. 나는 그때 내 것을 하나도 안 샀어. 옷도 남이 주는 것을 입었고 겨울에 신발 밑창이 떨어지면 실로 꿰매서 신었지. 공장에서 실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거 하나는 넉넉했어. 그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늙어보니 그게 꼭 잘한 것만은 아니더라. 동생들은 그거를 모르니까, 모르는 게 맞고.

서울은 한 번도 못 가봤어. 그 무렵에 같은 방 쓰던 아이들이 하나둘 서울로 옮겨 가면서 같이 가자는 말도 했는데 나는 못 갔어. 부산에서 통영으로 부치는 돈줄을 끊을 수가 없었으니까 못 갈 이유를 대자면 얼마든지 있었지. 부산에서 육십 년을 살면서 서울을 한 번을 못 가봤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사실은 안 가본 데가 무서워지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거야.

배에서 사고가 났다고 전보가 왔는데, 그 종이가 손바닥만 했고 글자가 몇 자 안 됐어.
배에서 사고가 났다고 전보가 왔는데, 그 종이가 손바닥만 했고 글자가 몇 자 안 됐어.

스물일곱에 아부지가 돌아가셨어. 배에서 사고가 났다고 전보가 왔는데, 그 종이가 손바닥만 했고 글자가 몇 자 안 됐어. 나는 그 몇 자를 몇 번을 다시 읽었어. 읽어도 더 나오는 말이 없더라. 그렇게 큰일을 그렇게 작은 종이에 적어서 보낸다는 것을 그날 알았고, 그 뒤로 나는 누가 전보 왔다는 소리만 해도 가슴이 먼저 내려앉았어.

그날 밤차를 탔어. 창밖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유리에 내 얼굴만 비쳐서 그걸 보고 앉아 갔고, 차가 설 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직 멀었나 아직 멀었나 했어. 나는 그 밤에 울지 않았어. 도착해서 울려고 그랬는지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다만 그 밤차가 그렇게 느린 차인 줄은 그날 처음 알았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 끝나 있었어. 마당에 사람들이 있고 어무이가 그 가운데 앉아 계셨는데 나를 보시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라. 임종을 못 봤어. 부산에 있느라고. 그 말을 나는 그 뒤로 사십 년을 속으로 되뇌었어.

아부지는 말이 없는 분이었어. 며칠씩 배를 타고 나갔다 들어오시면 꼭 뭘 사 오셨는데, 마지막에 뭘 사 오셨는지가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게 두고두고 그래. 사람이 가고 나면 큰 것은 남고 작은 것이 먼저 없어지는데, 나한테는 그 작은 것이 자꾸 필요하더라.

장례를 치르고 나서 동생들을 봤어. 명수가 스물다섯이었고 명자가 스물둘, 명호가 열아홉에 명희가 열여섯이었는데, 그 넷이 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집에 이제 어른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그때 알아졌어. 어무이는 그때도 굴을 까셨어. 손이 성한 날이 없는 그 손으로 까셨는데 그걸로는 안 됐어.

그때부터 내가 진짜 장녀가 된 거야. 그전까지는 장녀라고 해도 위에 아부지가 계셨는데 그 자리가 비니까 동생 넷하고 어무이가 통째로 내 손에 걸리더라. 여자한테 군대는 없지. 대신 장녀라는 게 군대야. 열넷부터 스물여덟까지 내 월급이 내 것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렇게 살아서 막내를 대학까지 보냈고 그 아가 지금 학교 선생이니까, 그거 하나로 나는 됐어.

통영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차를 탈 때 어무이가 골목 끝까지 나와서 서 계셨어. 차가 돌아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계시는 걸 뒤창으로 봤는데, 나는 그때 손을 안 흔들었어. 흔들면 내려버릴 것 같아서. 그 뒤로 통영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어무이는 늘 그 자리였어.

부산으로 돌아와서 다시 공장에 앉았어. 앉아서 실밥을 뜯는데 손은 전하고 똑같이 움직이는데 머릿속이 자꾸 딴 데 가 있었고, 그해 겨울에 나는 처음으로 이 일을 언제까지 하나 하는 생각을 했어. 그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생각을 해도 달라질 게 없으면 사람은 생각을 안 하게 되는데, 아부지가 가시고 나니까 이제는 내가 달라져야 저 넷이 산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라.

십 년 넘게 앉았더니 몸이 먼저 알려주더라.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한 번에 안 펴져서 벽을 짚고 조금씩 폈고, 앉을 때보다 일어설 때가 더 힘들어졌어. 스물여덟인데 걸음이 어른들 걸음이었어.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좋은 일도 아니고 편한 일도 아니고 그냥 서서 하는 일이었어.

돈은 조금씩 있었어. 봉투째 부치면서도 몇 해 전부터는 얼마씩 따로 떼어서 모아뒀는데, 십 년 넘게 그러니까 큰돈은 아니어도 뭘 한 번 해볼 수는 있는 돈이 됐어. 그걸 방바닥에 다 꺼내놓고 세어본 날이 있어. 세어놓고 보니 이게 내 십 년이구나 싶은데 생각보다 부피가 작아서, 다시 담아 넣고 며칠을 잠을 설쳤어.

나는 좌판 앞에 서서 아지매들이 생선 배를 가르는 것을 한참씩 봤어.
나는 좌판 앞에 서서 아지매들이 생선 배를 가르는 것을 한참씩 봤어.

자갈치는 그전부터 가끔 갔어. 일요일에 광복동을 걷다가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가는 날이 있었는데, 시장에 들어서면 얼음 깨는 소리하고 도마에 칼 닿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고 바닥에 물이 흥건해서 신발이 다 젖었어. 나는 좌판 앞에 서서 아지매들이 생선 배를 가르는 것을 한참씩 봤어. 통영에서 어릴 때부터 보던 것인데 여기서는 그게 놀이도 반찬도 아니고 일로 보이더라. 그러고 나오면 손에 비린내가 배지도 않았는데 배어 있는 것 같았고, 공장에 돌아와 앉아서 실을 뜯는 내내 그 도마 소리가 귀에서 안 떨어졌어.

그해 봄부터는 아예 새벽에 나가봤어. 공장 들어가기 전에 시장을 한 바퀴 돌면 자리마다 값이 다르고 목이 좋은 자리는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물어볼수록 내 돈으로 될 자리가 어디쯤인지가 손에 잡히더라. 그렇게 몇 달을 돌아다니고 나니까 이제 안 하면 그만두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였어.

스물여덟에 좌판을 하나 얻어보겠다고 하니까 다들 말렸어. 십 년 넘게 앉아서 익힌 것을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그 돈을 그렇게 날리면 어쩌느냐, 시장에서 여자가 오래 못 버틴다. 그중에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이거야. 「여자가 생선을 우예 다루노.」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손을 봤어. 실밥 뜯느라 굳은살이 앉고 감각이 좀 없어진 손인데, 그 손이 십 년 동안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남보다 빠르다는 거였어. 실을 뜯든 칼을 잡든 빠른 손은 빠른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 말리는 사람들이 대는 이유가 다 여자라는 데 걸려 있지 내 손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았어.

그래서 하기로 했어. 모은 것을 다 들고 나가서 좌판 하나를 얻기로 하고, 그날 저녁에 방에 들어와 앉아서 오래 있었어. 열네 살에 부산역 앞에 서서 사람들이 어디로 가나 그것만 보고 있던 아이가 이제 자기 갈 데를 하나 정한 건데, 그때는 이 손이 앞으로 무엇을 잡게 될지 나도 몰랐어.

일 년의 반

스물넷에 중매가 들어와서 남포동 다방에서 사람을 보기로 한 날,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이십 분이나 먼저 가서 문이 잘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아 찻잔만 만지고 있었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내려다보기를 몇 번이나 하다 보니 나중에는 목덜미가 다 뻐근할 지경이었어. 그러다 그 사람이 들어왔을 때는 굳이 누구시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지. 얼굴이 새까맸으니까. 원양어선을 탄다는 말은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 검은 것이 볕에 하루 이틀 그을린 색이 아니고 살 안쪽까지 배어들어가 씻어도 안 지워지는 색이라, 다방 안의 희끄무레한 얼굴들 사이에서 그 사람 혼자만 아주 딴 데서 걸어 들어온 사람 같았어.

그 사람은 자리에 앉으면서 모자를 벗어 무릎에 얹더니, 중매 선 아지매가 인사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를 똑바로 보고 「밥은 잡샀습니까」 그러더라. 그게 첫마디야. 나는 그 말이 우스워서 그만 웃어 버렸고, 웃고 나서는 실례가 될까 싶어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는데, 그 사람은 무안해하기는커녕 나를 따라 한 번 씩 웃고는 그러고 또 아무 말이 없었어.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괜히 창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고, 그 사람은 그동안 무릎에 얹은 모자챙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지. 다방에 노래가 한 곡 다 지나가고 다음 곡이 걸리도록 우리 둘은 그러고 앉아만 있었지.

손등에는 그물에 쓸린 자국이 희게 여러 줄 나 있었고 손가락 마디가 굵어서 주먹을 쥐면 잘 안 펴질 것 같았어.
손등에는 그물에 쓸린 자국이 희게 여러 줄 나 있었고 손가락 마디가 굵어서 주먹을 쥐면 잘 안 펴질 것 같았어.

그 사람이 찻잔을 드는데 그때 손이 눈에 들어왔어. 손톱이 성한 게 하나도 없더라. 열 개가 다 깨져 있고 그중 어떤 것은 반이 날아가서 그 밑의 살이 그대로 비쳤는데,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지 상 위에 그냥 얹어 놓고 있었고, 찻잔도 손잡이를 잡는 게 아니라 두 손으로 통째로 감싸 쥐고 마시더라. 손등에는 그물에 쓸린 자국이 희게 여러 줄 나 있었고 손가락 마디가 굵어서 주먹을 쥐면 잘 안 펴질 것 같았어. 그물을 날마다 만지는 손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굳이 배우지 않고 알고 있었어.

나는 그 손을 보고 이 사람이면 되겠다 싶었어. 곱상한 사람을 찾아 나온 게 아니고 같이 고생할 사람을 찾아 나온 거였으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이미 마음을 정해 놓고 남은 차를 다 마셨지. 그 사람은 나가면서 다방 문을 밀어 주고는 내가 다 나올 때까지 그 무거운 문을 손으로 붙들고 서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그 손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았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건 그 사람한테 참 미안한 말이야. 그 사람도 어디 편한 데 앉아서 편하게 살고 싶었을 텐데, 나는 그 사람의 제일 험한 데를 보고 저 사람이면 견디겠다 했으니까.

세 번째 만난 날에 그 사람이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찻잔을 저만치 밀어 놓고 나를 보더니 「내는 일 년에 반은 배에 있습니더.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러더라. 꽃도 없고 반지도 없고 듣기 좋은 말도 한마디 없이 그것뿐이었어. 다방 안이 조용해서 그 말이 옆자리에까지 다 들렸을 텐데 그 사람은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안 했지. 그 말을 해 놓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 사람은 상 밑에서 무릎을 떨고 있었지. 나는 「되지예」 그랬어. 그게 다야.

나중에 애들이 다 커서 그 얘기를 듣고는 「아부지 너무한 거 아이가」 하면서 웃던데, 나는 그 자리에서 같이 웃지를 못했어. 없을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미리 말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으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은 적어도 나한테 거짓말은 안 하겠구나 했고, 그 뒤로 사십 년을 살면서 그 짐작 하나만은 틀리지 않았어.

그때 그 아이가 열세 살이었는데, 손등으로 눈을 자꾸 문지르면서도 나한테서 눈을 안 떼고 울고 있더라.
그때 그 아이가 열세 살이었는데, 손등으로 눈을 자꾸 문지르면서도 나한테서 눈을 안 떼고 울고 있더라.

칠십육 년에 식을 올렸어. 예식장이라고 해 봐야 의자를 줄지어 놓은 방 하나였고 사진도 몇 장 찍지 못했지. 머리에 얹은 것이 무거워서 고개를 숙일 때마다 목이 뻣뻣했고 방 안이 더워서 분이 자꾸 흘러내렸어. 절을 하려고 몸을 돌리는데 앞줄에 앉은 명희가 눈에 들어왔어. 그때 그 아이가 열세 살이었는데, 손등으로 눈을 자꾸 문지르면서도 나한테서 눈을 안 떼고 울고 있더라. 예식이라는 게 삼십 분이면 다 끝나는 건데 그 삼십 분이 어찌나 길던지 나중에는 다리가 다 저렸어.

나는 그 아이 눈을 끝내 못 봤어. 한 번이라도 마주 보면 나도 따라 울 것 같았으니까 고개를 앞으로만 두고 식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버텼지. 그날은 종일 앞만 보고 있었어. 식이 다 끝나고 나서야 명희를 찾았는데 그때는 벌써 눈이 다 말라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탕을 물고 있더라. 그래서 그날 찍은 몇 장 안 되는 사진마다 내 얼굴이 하나같이 정면이야.

신혼집은 영도 산복도로 꼭대기의 단칸방이었어. 계단을 백 개도 넘게 올라가야 겨우 그 집 문이 나왔지. 이사 가던 날 짐을 지고 오르면서 대체 몇 개인가 하고 세어 봤는데 백 개를 넘기고부터는 숨이 차서 놓쳐 버렸고, 그 뒤로는 다시 세어 볼 생각을 아예 안 했어. 나중에는 어느 계단에서 한 번 쉬어야 하는지를 머리보다 발이 먼저 알더라. 겨울에 얼기라도 하면 그 계단이 통째로 미끄럼틀이 돼서 아랫집 아지매가 소금을 뿌리고 다녔어.

물을 흘리면 흘린 만큼 도로 내려가야 하니까 걸음을 짧게 떼고 무릎을 덜 꺾는 법도 그 계단에서 배웠어.
물을 흘리면 흘린 만큼 도로 내려가야 하니까 걸음을 짧게 떼고 무릎을 덜 꺾는 법도 그 계단에서 배웠어.

그 집에는 물이 안 나와서 아래에서 길어 올려야 했는데, 그 사람은 배에 있었으니 물지게는 언제나 내 몫이었어. 양동이 두 개를 걸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반쯤 올라갔을 때 어깨가 아니라 귀 뒤가 먼저 뻣뻣하게 아파 왔고, 한 번 내려놓고 앉으면 다시 못 일어설 것 같아서 아예 쉬지 않고 끝까지 올라가는 버릇이 그때 들었지. 물을 흘리면 흘린 만큼 도로 내려가야 하니까 걸음을 짧게 떼고 무릎을 덜 꺾는 법도 그 계단에서 배웠어. 그렇게 길어 올린 물로 밥을 안치고 빨래를 하고 나면 하루가 벌써 반은 지나가 있었고,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어깨가 아니라 손바닥이 먼저 아팠어.

그런데 그 방에서는 바다가 보였어. 문을 열어 놓고 앉으면 영도 앞바다가 마당처럼 펼쳐져서, 그 사람 배가 들어오는 날은 방바닥에 앉은 채로 그게 들어오는 걸 다 볼 수 있었지. 그래서 계단이 백 개든 이백 개든 나는 그 집이 싫지 않았어. 나가는 날도 그 방에서 봤어. 짐을 지고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골목을 돌아 안 보이게 되면, 나는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배가 부두를 떠나 점처럼 작아질 때까지 봤고, 그러고 나면 그날부터 몇 달이 시작되는 거였어. 그 몇 달이 며칠인지는 나가는 사람도 나도 모르는 거였고.

그 사람 배는 언제 들어온다는 날짜가 없었어. 전보가 한 장 오면 그때부터 며칠 안에 들어오는 건데, 그 며칠이 일 년 중에 제일 길었지. 나는 그동안 방을 쓸고 또 쓸고, 이불을 내다 널었다가 걷고, 쌀을 미리 씻어 놨다가 쉴까 봐 도로 헹구고, 그러다 못 참고 문을 열어 바다를 한 번 보고 다시 닫고 또 열었어. 그 며칠은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더라. 전보를 받은 날은 그 종이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봤어. 그러다 정작 배가 들어오는 걸 보고 나면 나는 문부터 닫고 앉아서 숨을 한참 골랐어.

처음 몇 해는 그 사람이 없는 밤이 무서웠어. 계단 위 단칸방에 혼자 누워 있으면 바람이 문을 흔드는 소리가 꼭 누가 밖에 서 있는 소리 같아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을 새운 적이 여러 번이야. 그 집 문은 안에서 잠가도 손으로 밀면 덜컹거려서 밤마다 걸상을 하나 갖다 받쳐 놓고 누웠지. 무서우면 일어나 앉아서 등을 켜 놓고 바느질을 했고, 바느질할 게 없으면 멀쩡한 옷을 뜯어서 다시 꿰맸어. 그러다 어느 해부터인가는 무섭지가 않아졌어. 무서운 게 없어진 게 아니고 무서워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진 거였지.

그 사람이 들어와 있는 몇 달은 집이 통째로 달라졌어. 방에 사람 하나가 더 있다는 것만으로 공기가 무거워지고, 밥상 위에 숟가락이 하나 더 놓이고, 밤에 옆에서 숨소리가 났지. 그런데 돌아온 첫 며칠은 도리어 서로 서먹해서 말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몰랐어. 몇 달을 떨어져 있다가 마주 앉으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하는지를 둘 다 모르는 거야. 그러다 겨우 편해질 만하면 이미 나갈 날이 코앞이었고, 나는 그 몇 달 동안은 그 사람이 뭘 흘리든 어질러 놓든 잔소리를 안 했어.

그 방에서 그 사람 배가 들어오는 게 다 보였어.
그 방에서 그 사람 배가 들어오는 게 다 보였어.

우리는 싸운 적이 거의 없어. 일 년에 반은 없는 사람인데 뭐 하러 싸우겠어. 들어와 있는 몇 달은 그 며칠이 아까워서 못 싸웠고, 배를 타고 나가고 나면 싸울 사람이 아예 없었지. 싸우다 만 것을 몇 달씩 품고 있다 보면 그게 저절로 삭아서 나중에는 무슨 일로 그랬는지도 잊어버렸어. 속에 있는 말을 못 하고 그냥 넘어간 것도 한둘이 아닌데 그것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몰라. 그래서 우리 부부가 사이가 좋았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지금도 얼른 대답을 못 해.

처음 얼마간은 그게 억울했어. 남들은 저녁이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나는 혼자 상을 펴고 혼자 치우는 게 억울했고, 왜 하필이면 배 타는 사람한테 시집을 왔나 싶어 이불 속에서 눈만 뜨고 있던 밤도 있었지.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알았어. 내가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기다리는 시간에도 내 인생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기다리는 동안 애 둘을 낳아서 키웠으니까.

내가 자갈치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시절에는 제 아내가 시장 바닥에 나가 앉는 걸 싫어하는 남자가 많았고, 나도 한바탕 들을 각오를 하고 밥상 앞에서 꺼낸 말이었지. 그런데 그 사람은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고 나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디 해라」 그 말만 했어.

그러고는 그 얘기를 다시 꺼내는 법이 없었어. 잘돼 가느냐고도 안 묻고 힘들지 않으냐고도 안 물었지. 배를 타는 사람이라 사람이 벌어야 산다는 걸 진작에 알았던 거야. 나는 그 넉 자 말고는 그 사람한테서 잘해 보라는 말을 따로 받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그 넉 자를 사십 년을 두고 우려먹었지. 손을 베던 날도, 일이 안 풀려서 그 계단을 유난히 무겁게 올라오던 날도,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되뇌고 나면 다음 날 새벽에 또 나가지더라.

마지막으로 내린 배에서 짐을 지고 그 계단을 올라오는데 그날은 짐이 유난히 많았어.
마지막으로 내린 배에서 짐을 지고 그 계단을 올라오는데 그날은 짐이 유난히 많았어.

그 사람이 배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은 건 오십을 넘기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내린 배에서 짐을 지고 그 계단을 올라오는데 그날은 짐이 유난히 많았어. 배에 두고 쓰던 것을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들고 왔으니까. 나는 문간에서 그 짐을 받아 들면서 이제 이 사람이 아주 왔구나 했어. 그날은 그 사람도 마지막 계단에서 짐을 내려놓고 한 번 쉬었는데, 그 계단에서 그 사람이 쉬는 걸 나는 그날 처음 봤어. 짐에서 나던 냄새가 며칠을 안 빠져서 방에 앉아 있으면 바다에 앉은 것 같았어.

그날 저녁을 먹고 둘이 옥상에 올라갔어. 여름이었고 바람이 좋았지. 그 사람이 난간에 팔을 얹고 한참을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더니 「인자 저거 안 봐도 된다」 그러더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았으니까. 평생을 저 물 위에서 벌어먹고 산 사람이 이제 저거 안 봐도 된다고 말하는 데는 안 봐도 된다는 뜻 하나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지. 나는 옆에 서서 같이 바다만 봤어. 우리 둘이서 그렇게 오래 같은 것을 같이 본 적이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어.

그 뒤로 옥상에 평상을 하나 놨어. 여름이면 거기서 저녁을 먹었지. 밥상을 이고 그 계단을 또 올라가는 게 일이었는데 앞뒤로 들고 둘이 하니까 그게 일 같지가 않더라. 영도 앞바다가 다 내려다보이는 자리라 해질녘이면 건너편에 불빛이 하나씩 켜지는데, 그 켜지는 걸 우리 둘이 앉아서 끝까지 다 보고서야 상을 물렸어.

그 사람은 평상에 올라가면 말이 없었어. 나도 굳이 묻지를 않았고. 사십 년 중에 반을 못 보고 산 사람하고 나란히 앉아서 아무 말도 없이 있으면 어색할 법도 한데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았어.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도 우리한테는 오래 익혀 온 일이었으니까. 밤이 깊어서 모기가 달려들어야 그제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섰지. 그 사람이 먼저 내려가면 내가 상을 들고 뒤를 따랐고 그 순서가 몇 해를 그대로였어.

환갑에 애들이 돈을 모아서 제주도를 보내 줬어. 결혼하고 삼십육 년 만에 둘이 처음으로 가 보는 데였지. 공항에서 그 사람이 신발을 벗어야 하는 줄 알고 허리를 굽히다 만 것도 우스웠고, 표를 손에 어찌나 꼭 쥐고 있었던지 자리에 앉을 때는 이미 다 구겨져 있던 것도 우스웠어.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 사람 둘이 나란히 앉아서 서로 안전띠를 봐 주고 있었지.

비행기가 뜨고 나서 그 사람은 창밖만 봤어. 고개를 창에 붙이다시피 하고 내리 내려다보고 있었지. 평생 바다를 밑에서만 보던 사람이 위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면서, 한참 있다가 혼잣말처럼 「바다가 이래 생겼구나」 그러더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창밖이 아니라 그 사람 옆얼굴을 봤어. 사십 년을 같이 산 사람 얼굴을 그날 처음 보는 것처럼 봤어.

그 사람이 병원에 눕고부터는 내가 그 옆에 붙어 있었어. 이천십육 년이야.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으면 그 사람은 자다 깨다 했고, 깨어 있는 동안에도 어디가 아프다는 말조차 거의 없었지. 평생 말이 없던 사람이라 마지막에도 그렇게 조용했어. 밤에는 다른 보호자들이 번갈아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나는 나가 있을 데가 없어서 복도 끝 창가에 한참 서 있다 들어오곤 했어.

나는 고생했다는 말을 그 사람한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사십 년을 안 했어. 병원에서는 그 말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 갈 때마다 오늘은 기어이 한다고 정하고 병실 문을 열었는데, 막상 그 얼굴을 보고 나면 목이 안 떨어지더라. 입이 안 떨어지는 게 아니고 목이 안 떨어져. 말이 목 아래 어디에 걸려서 도무지 위로 안 올라오는 거야.

마지막 날에도 나는 결국 그 말을 못 했어. 손을 잡고 앉아 있었지. 처음 만나던 날 손톱이 다 깨져 있던 그 손이 그때는 살이 빠져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고, 나는 그걸 내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어. 그러다 그 사람이 내 손을 한 번 꽉 쥐었어.

나는 그게 「안다」인 줄로 알아. 이제 와서 어디 물어볼 데가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정해 놓은 거야. 그래야 내가 사니까.

옥상 평상은 그 사람 가고 나서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뒀어.
옥상 평상은 그 사람 가고 나서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뒀어.

옥상 평상은 그 사람 가고 나서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뒀어. 여름이면 저녁을 먹고 아직도 그 위에 올라가서 앉아. 둘이 앉으라고 놓은 자리인데 이제는 나 혼자 올라가지. 불빛이 하나씩 켜지는 것도 여전히 끝까지 다 보고 내려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라고

칠십칠 년에 성근이를 낳았어. 그 사람은 그때 배에 있어서, 나는 전보를 쳐놓고도 이게 언제 어느 항구에 닿을지 알 수가 없었고 답이 올 데도 없다는 걸 알면서 부쳤지. 전보라는 게 글자 수대로 돈을 받는 거라 할 말을 다 못 쓰고 아들이라는 말하고 잘 있다는 말만 넣었는데, 창구에 그 종이를 밀어 넣고 돌아서면서 이 짧은 걸 받아 들고 저 사람이 무슨 그림을 그릴까 싶어서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어. 그 사람 얼굴을 본 건 두 달이 지나서였어. 그 두 달 동안 나는 미역국을 내가 끓여서 내가 먹었고, 애가 울면 내가 안고 애가 자면 내가 빨래를 하고, 밤에 열이 오르면 내가 업고 마당을 왔다 갔다 했어. 애를 처음 안는데 손이 떨려서, 나는 이 떨리는 게 무서워서인지 좋아서인지 구별을 못 하고 팔에 힘만 주고 있다가 이러다 애를 조이겠다 싶어서 다시 힘을 뺐어. 옆에 아무도 없었어. 어머니는 통영이고 그 사람은 바다고, 그러니까 그 방에서 숨을 쉬는 사람을 세어보면 나하고 이 조그만 것 둘뿐이었어.

그날 밤에 애를 눕혀놓고 얼굴을 들여다봤어. 이마가 좁고 눈두덩이 부어서 그 사람을 닮았는지 나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는 얼굴인데, 자다가 입을 오물거리는 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그러고 보고 있다가 그 얼굴에 대고 「니하고 나하고 둘이다」 했어. 겁을 주려고 한 말도 아니고 다짐을 하려고 한 말도 아니었어. 그냥 그 방에 있는 사람을 세어보니 둘이라서 그 말이 나온 거야. 그러고는 불을 못 끄고 앉아서 애가 숨을 쉬나 안 쉬나 그것만 보다가, 배가 조금씩 오르내리는 걸 확인하고 나면 눈을 붙였다가 또 놀라서 깨서 다시 들여다보고 그러면서 밤을 다 보냈어. 지금 생각하면 그 밤이 내 평생에 제일 조용한 밤이었어. 그 뒤로는 조용할 새가 없었으니까.

이름은 그 사람이 배에서 편지로 보내왔어.
이름은 그 사람이 배에서 편지로 보내왔어.

이름은 그 사람이 배에서 편지로 보내왔어. 봉투가 눅눅하고 귀가 다 닳아서 몇 사람 손을 거쳐 왔는지 모를 지경인데, 안에 든 종이에는 이룰 성에 뿌리 근, 뿌리를 내리라는 뜻이라고만 적혀 있고 다른 말은 별로 없었어. 나는 그 글자를 손끝으로 짚어보면서 배 타는 사람이 지은 이름치고는 참 그렇다 싶었지. 자기는 평생 떠 있으면서 아들한테는 뿌리를 내리라고. 그래도 그 말이 좋아서 애를 업고 동사무소에 가서 그대로 올렸고, 돌아오는 길에는 성근아 성근아 하고 몇 번 불러보면서 이 이름이 이 애 입에 붙나 안 붙나를 혼자 재봤어. 그런데 몇 해가 지나 애 둘을 옆집에 맡겨놓고 새벽에 문을 나서면서 생각해보니, 뿌리를 내리라고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집에 없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집에 없었어.

애가 손을 뻗어서 자꾸 만지려고 드는 통에 그 사진은 나중에 가장자리가 까맣게 손때가 타고 귀가 말려 올라갔어.
애가 손을 뻗어서 자꾸 만지려고 드는 통에 그 사진은 나중에 가장자리가 까맣게 손때가 타고 귀가 말려 올라갔어.

성근이가 처음 한 말은 「아빠」였어. 그 사람은 배에 있는데 사진을 보고 그러더라고. 내가 매일 보여줬으니까. 벽에 붙여놓은 사진을 아침저녁으로 가리켜 보였으니까, 그 애한테 그 얼굴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벽에 붙은 무늬 같은 거였을 텐데도 소리는 그쪽이 먼저 나온 거야. 하루 종일 저를 안고 업고 씻기는 나는 두고 종이에 대고 그 소리를 하는데, 나는 그게 좋다가 서운하다가 하다가 결국은 그 애를 안고 사진 앞에 다시 서서 또 가리켜 보였어. 애가 손을 뻗어서 자꾸 만지려고 드는 통에 그 사진은 나중에 가장자리가 까맣게 손때가 타고 귀가 말려 올라갔어.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애가 그 얼굴을 보고 「아빠」 하니까, 그 사람이 신발도 못 벗고 마루에 그냥 주저앉더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는 부엌에서 물을 올려놓고 그 등을 보고 있었는데, 어깨가 들썩이지도 않고 소리도 안 나고 그냥 앉아만 있어서 저 사람이 지금 우는 건지 다리가 풀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도 물만 끓이고 서 있었어. 그 사람 발치에 여태 안 벗은 신발이 놓여 있는데 바닥에 소금이 허옇게 앉아 있는 게 부엌에서도 보이더라. 한참 있다가 그 사람이 손을 뻗어서 애를 안았는데, 애는 낯이 설어서 몸을 비틀고 나한테 오려고 하고 그 사람은 놓지를 못하고 그래서, 나는 물을 내려놓고 가서 둘을 떼어놨어.

팔십 년에 미숙이를 낳고 나서 몇 해가 제일 힘들었어. 애 둘에 시장 일에, 새벽 네 시에 나가서 밤 아홉 시에 들어왔으니까 애들이 깨어 있는 걸 본 날이 한 달에 며칠이나 됐을까 싶어. 아침에 나갈 때 둘 다 자고 있고 밤에 들어오면 둘 다 자고 있고, 나는 자는 얼굴만 보다가 이 애가 그새 이만큼 컸구나 하는 걸 손으로 재보고 이불을 덮어주고 나왔어. 발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으면 그거 하나 넣어주는 게 내가 그날 애한테 해준 전부인 날도 많았어. 손톱 발톱이 길어 있으면 그것도 자는 애 손을 붙들고 깎았는데, 깎다가 애가 뒤척이면 손을 놓고 기다렸다가 또 깎고 그러느라 한쪽 손을 다 깎는 데 한참이 걸렸어. 옷이 작아진 것도 낮에 본 게 아니라 밤에 걷어 올라간 소매를 보고 알았어. 그 몇 해는 내가 애를 키운 게 아니라 애가 크는 걸 뒤에서 겨우 따라간 거야.

애들은 옆집 아지매가 봐줬어. 그 집은 문을 열어놓고 사는 집이라 우리 애들하고 그 집 애들하고 섞여서 놀았는데, 미숙이는 걸음마를 그 집 마루에서 뗐고 밥도 거기서 먹고 낮잠도 거기서 잤어. 우리 집에는 잠만 자러 들어왔지. 밤에 들어와서 그 집 문을 두드리면 아지매가 애 둘을 하나씩 안고 나오는데, 잠든 걸 받아 안으면 애들 몸에서 그 집 냄새가 났어. 그 집 부엌 냄새하고 그 집 이불 냄새하고 그 집 비누 냄새가 밴 거지. 삯은 달마다 봉투에 넣어서 드렸는데, 아지매가 그걸 받으면서 매번 뭘 이런 걸 다 준다는 낯을 하고 도로 밀어 보내는 시늉을 하는 게 나는 더 미안했어. 나는 그때 그게 고맙기만 한 일인 줄 알았어.

미숙이가 다 커서 언젠가 밥상에서 그 얘기가 나왔어. 저는 웃으면서 「엄마 냄새보다 아지매 냄새가 익숙했다」 하고는 옛날얘기 툭 던지듯이 하고 다음 반찬으로 넘어갔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지를 못했어. 밥그릇을 든 채로 손이 안 움직여서 국을 뜨는 척하면서 국자만 한참 젓고 있었지. 그 국은 다 식었을 거야. 저 애는 저 말을 그날 처음 한 게 아니고 속으로는 수십 번 해봤을 텐데, 수십 번 해보고 나서야 저렇게 웃으면서 나올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저건 다 삭혀서 내놓은 말인데, 나는 그걸 앉은자리에서 물어볼 수가 없더라. 물어보면 저 애가 아니라고 할 게 뻔하고, 아니라고 하면 나는 그 말에 기대고 싶어질 거고, 그러면 저 애는 또 저 혼자 삭혀야 할 테니까. 그러고 나서 나도 웃었어. 늦게 웃었지. 그날 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하면서 내 냄새라는 게 대체 뭔가를 한참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선 냄새 말고는 안 떠오르더라.

미숙이가 여섯 살 때 내 좌판 흉내를 낸 적이 있어. 방바닥에 인형을 죽 늘어놓고 그게 생선인 양 손바닥으로 탁탁 쳐가면서 「고등어 사이소」 하는데, 목소리를 끝에서 끌어올리는 데까지 나하고 똑같이 하더라고. 온 식구가 웃었어. 그 사람도 웃고 성근이도 웃고 나도 웃었는데, 웃으면서 나는 부끄러웠어. 저 애가 나를 하루에 몇 시간을 못 보면서도 내 목소리 하나는 저만큼 알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고, 저 애가 아는 엄마가 밥 차려주고 머리 땋아주는 엄마가 아니라 저는 가본 적도 몇 번 없는 그 좌판의 소리라는 게 부끄러웠어. 그래도 웃어야 하니까 웃었지. 애가 신이 나서 한 번 더 하는데 두 번째는 나도 소리를 내서 웃었고, 웃고 나니까 목이 아팠어. 그러고 며칠은 그 소리가 자꾸 귀에 남아서, 좌판에서 내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저 애가 이걸 흉내 냈지 싶어서 소리가 목에서 걸리더라.

애들이 몰랐으면 하는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돈이었어. 팔십년대 말에 그 사람 배가 몇 달을 안 나갔어. 그때 나는 내 좌판을 펴기 전 새벽에 남의 좌판 생선까지 손질해주고 돈을 받았는데, 그러고 나면 눈을 붙일 시간이 없어서 아침에 집에 들어와 자는 척을 하고 누워 있었어. 진짜로 자야 하는 건데 자면 그날 하루를 놓칠 것 같아서 눈만 감고 있었지. 애들이 학교 가면서 방문을 열어보고 엄마 잔다고 저희끼리 소곤거리며 나가는 소리를 나는 다 듣고 누워 있었어. 애들 눈에는 그게 그냥 늦잠으로 보였을 거야. 그 몇 달을 어떻게 넘겼는지는 지금도 잘 안 떠올라. 넘긴 건 아는데 어떻게 넘겼는지가 안 떠올라. 애들은 몰랐어. 지금도 몰라.

가정통신문을 밥상 위에 올려두고 밤에 들어와서야 읽었어.
가정통신문을 밥상 위에 올려두고 밤에 들어와서야 읽었어.

학교 행사에는 한 번도 못 갔어. 둘 다, 한 번도. 운동회도 못 가고 학예회도 못 가고 상 받는 날도 못 갔어. 시장을 비울 수가 없었어. 하루를 비우면 그 하루치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 자리가 없어지는 거라서, 나는 아침마다 그걸 저울에 얹어보고 매번 같은 쪽으로 내려놨어.

애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종이를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 나는 그걸 밤에 들어와서 봤어. 날짜가 벌써 지나 있는 것도 있고 내일인 것도 있는데, 내일인 걸 보면서도 나는 갈 수 있나 없나를 따져본 적이 없어. 따져볼 것도 없었으니까. 그 종이를 접어서 부엌 선반에 올려두고 나면 그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네 시에 나갔고, 선반에 몇 장 쌓이면 그걸 한꺼번에 치웠어. 개중에는 내가 아예 못 보고 지나간 것도 있었을 거야. 애들이 그 종이를 밥상 한가운데다 올려놓을 때 무슨 마음으로 거기다 올려놨을까 하는 건, 그때는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어.

그런데 애들이 그걸 가지고 나한테 뭐라고 한 적이 없어. 한 번도. 운동회 다녀온 날 저녁에 오늘 뭐 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했다고만 하고 말았어. 나는 안 물어봐주는 게 편해서 더 안 물어봤고, 그렇게 몇 해가 지나니까 물어볼 말도 없어졌어.

성근이가 군대 가기 전날에 둘이 술을 한잔했어. 소주 한 병을 놓고 마주 앉았는데, 그 애가 내 잔에 술을 따르면서 이런저런 옛날얘기를 하다가 「엄마는 늘 자갈치에 계셨죠」 하더라. 서운했다는 말은 안 했어. 원망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냥 있었던 일을 말하는 소리였는데, 원망을 했으면 내가 미안하다고라도 했을 텐데 있었던 일을 말하니까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게 더 아팠어. 나는 그 애 잔을 채워주기만 했어. 손이 떨려서 넘칠 뻔했는데 그 애가 얼른 잔을 들어서 받아주더라. 그 애도 더는 그 얘기를 안 하고 잔을 받아서 마셨고, 우리는 그 병을 다 비울 때까지 다른 얘기를 하다가 자리를 폈어. 이튿날 아침에 그 애를 보내고 돌아와서 잔 두 개를 씻는데, 그제야 어제 그 말에 무슨 대꾸를 했어야 했나 싶더라.

나들이라고 할 만한 건 일 년에 한 번 통영 가는 것뿐이었어. 외갓집인데 애들은 그게 나들이인 줄 알았어. 배를 타고 가니까. 어머니가 굴국을 끓여주시면 애들이 그걸 잘 먹었는데, 내가 어릴 때 먹던 그 국을 애들이 후후 불어가며 먹는 걸 보고 있으면 나는 숟가락 드는 걸 잊고 있었어.

미숙이가 대학에 붙었을 때보다 더 좋았던 날이 따로 있어. 그 애가 첫 월급을 타서 지 오빠 구두를 사 왔을 때야. 자기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오빠 것이었어. 내가 못 가르친 걸 저 애가 어디서 배웠나 싶다가, 내가 동생들한테 하던 걸 저 애가 어디선가 봤나 싶기도 하더라.

애들한테 물려줄 게 뭐가 있나 하면 식칼 하나야. 사십 년을 쓴 무쇠칼인데 갈고 갈아서 이제 날이 반밖에 안 남았어. 미숙이가 그거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하는데 아직 안 줬어. 내가 아직 쓰니까. 그거 하나는 애들이 봤을 거야, 매일 아침에 그걸 갈았으니까.

손주를 처음 안은 건 이천삼 년이었어. 성근이 아들이야. 그 애를 받아 안는데 무섭더라. 내 애 안을 때보다 더 무서웠어. 그때는 손이 떨려도 이건 내 애다 하는 게 있어서 떨리는 대로 안았는데, 이번에는 이 아이를 내가 잘못 안으면 어쩌나 하는 것만 있어서 팔에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더라고. 애 둘을 키워놓고도 안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사람처럼 팔을 이리 놨다 저리 놨다 했어. 옆에서 성근이가 웃는데 나는 그 웃음소리도 잘 안 들렸어.

손톱이 어찌나 얇던지 빛이 비쳐 보이더라.
손톱이 어찌나 얇던지 빛이 비쳐 보이더라.

그런데 그 애가 내 손가락을 꽉 잡더라고. 그 힘이 얼마나 세던지 이 조그만 것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나 싶어서, 나는 손가락을 빼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어. 손톱이 어찌나 얇던지 빛이 비쳐 보이더라. 그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성근이 낳던 밤이 떠올랐는데, 그때는 그 방에 둘뿐이었고 이번에는 방 안에 사람이 여럿이었어. 그 애를 성근이한테 넘겨주고 나서도 손가락에 그 힘이 한참 남아 있어서, 나는 그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앉아 있었어. 그 뒤로 둘이 더 생겨서 손주가 셋이 됐어.

명절은 설하고 추석이 달랐어. 설에는 통영에 갔고 추석에는 못 갔어. 추석이 대목이라 그랬지. 대신 추석 저녁에 넷이 앉아서 전을 부쳤어. 그 사람이 부치고 나는 뒤집고 애들은 옆에서 집어먹고, 접시에 쌓이는 것보다 없어지는 게 빨라서 밤늦도록 부쳤어. 그게 우리 명절이었어.

지금은 그 사람이 없으니까 부치는 사람이 없어. 내가 부치고 내가 뒤집어. 성근이가 옆에 앉아서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데 손이 굼떠서 내가 도로 뺏고, 미숙이는 애들 챙기느라 부엌하고 방을 왔다 갔다 하고, 손주 셋이 접시에서 집어먹고 도망가는 게 옛날에 그 자리에 있던 둘하고 똑같아. 부치는 게 뒤집는 것보다 손이 더 간다는 걸 나는 그 사람이 없고 나서야 알았어. 반죽 묻히고 기름 올리고 불 봐가면서 앉힐 자리 보고 하는 걸 그 사람이 다 해놓고 나한테는 뒤집는 것만 넘겨줬던 거지. 두 가지를 다 하려니 손이 모자라서, 요새는 미숙이가 옆에 붙어 앉는 날이 많아.

넷이 앉던 상은 이제 하나를 더 붙여야 앉아. 방석이 모자라서 어린것들은 방바닥에 그냥 앉는데, 그렇게들 앉아서 떠드는 소리를 부엌에서 듣고 있으면 기름 냄새 때문인지 뭔지 눈이 매워. 매우면 소매로 닦고 또 부쳐. 학교 행사에 못 간 건 이제 와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거고, 그건 그냥 내가 지고 가는 거지. 명절 전날 밤에는 칼부터 갈아. 사십 년 된 그 칼로 썰 것들을 다 썰어놓고 자리에 누우면, 이튿날 아침에 애들이 와.

칼 가는 소리

서른이 되기도 전에 허리가 먼저 굽었어. 봉제라는 게 하루 종일 앉아서 하는 일이라 십 년 넘게 그 자세로 있었더니 스물여덟에 벌써 아침에 눈을 뜨면 허리가 한 번에 안 펴져서 방바닥을 손으로 짚어 가며 조금씩 세워야 했는데, 그렇게 겨우 세워 놓고 나서 또 앉아서 하루를 시작하려니 이러다가는 마흔쯤에 아주 굽어서 못 펴는 사람이 되겠다 싶더라. 그날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서서 하는 일을 하자고 그것 하나만 정해 놓았는데, 정해 놓고 서서 하는 일 중에 내가 아는 게 뭐가 있나 손가락을 꼽아 보니까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나한테 남는 게 생선밖에 없었어. 생선은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통영 아이 아니냐.

자갈치에 좌판 하나를 얻던 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그런 건 이제 기억이 안 나는데, 사람 하나 서면 꽉 차는 그 자리 앞에 서서 오늘부터 여기가 내 자리다 하고 발로 바닥을 한 번 밟아 본 건 아직도 생각이 나. 자리라고 해 봐야 판때기 하나에 물 빠지는 자리 하나가 전부라서 남한테 내 가게라고 할 것도 못 되는 건데, 그래도 그 앞에 서 보니까 십 년을 앉아서 일할 때는 없던 게 하나 생기더라. 허리를 펴고 서서 앞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이 다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보는 것도 보여서, 나는 그날 물건도 몇 마리 못 팔면서 그 자리에 온종일 서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다 쳐다봤어. 십 년을 고개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서 있으니 그게 그렇게 시원하더라.

자갈치 하루는 새벽에 시작해. 물건을 받아다가 얼음을 깔고 늘어놓고 나면 그때부터 저녁까지는 서 있는 게 일인데, 손질은 손이 하고 발은 그 자리에 붙어 있고 눈은 통로만 보고 있는 거야. 겨울에는 바닷바람이 통로로 그대로 들어와서 앞치마 밑으로 파고드는데 손은 또 종일 물에 들어가 있으니까, 손끝은 감각이 없고 등은 시리고 발은 저리고 그런 채로 하루가 다 가더라. 그러다가 사람이 하나 앞에 와서 서면 그게 다 없어져. 사람이 서면 시린 것도 저린 것도 모르고 손이 먼저 움직여.

그런데 서 있기만 한다고 장사가 되는 건 아니라서 처음 몇 달은 내가 손질해 놓은 생선이 남의 것보다 눈에 띄게 못났어. 배를 갈라 놓으면 살이 뭉개져서 모양이 안 나오고 모양이 안 나오면 사람들이 앞에서 한 번 들여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는데, 내 솜씨 탓인 줄은 알겠는데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를 모르니까 나는 옆에서 남들 손 놀리는 걸 훔쳐보다가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돌리곤 했지. 저녁에 남은 걸 보고 있으면 그게 다 내가 못한 표시 같아서 혼자 얼굴이 뜨거웠어. 옆자리에 정순 언니가 있었어. 나보다 열 살 위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며칠 그렇게 지켜보고 있더니, 어느 날 아침에 자기 자리로 건너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도마에 생선 한 마리를 척 올려놓고 칼 잡는 법부터 알려줬어.

새벽에 좌판을 펴면 나무판 놓는 소리가 났어.
새벽에 좌판을 펴면 나무판 놓는 소리가 났어.

생선 배를 가르는 데는 각도가 있어. 힘으로 눌러서 되는 게 아니고 칼을 눕히는 정도가 따로 있는데 조금만 세우면 살이 뭉개지고 조금만 더 눕히면 뼈를 긁어서, 그 사이 어디쯤에 딱 하나 있는 그 자리를 눈이 아니라 손이 알아야 하는 거야. 언니는 내 손목을 잡고 자기 손목을 그 옆에 나란히 대고는 이만큼이다 이만큼, 하면서 몇 번을 같이 그어 줬는데 나는 그날 그걸 못 외웠어. 눈으로는 봤는데 손이 못 외운 거라서 나는 그 뒤로 저녁마다 남들 다 들어간 자리에 혼자 남아서 그날 안 팔리고 남은 놈으로 그어 보고 또 그어 보고 했지. 언니는 그러는 동안 잘한다는 말도 안 하고 못한다는 말도 안 하고 그냥 자기 일을 했어. 한 달쯤 지나니까 손이 먼저 알더라. 머리로 재지 않고 손목이 알아서 그만큼 눕는데, 한번 그렇게 들어오고 나니까 그 뒤로 삼십 년 동안 나는 그 각도를 한 번도 안 바꿨어.

그 언니가 십 년 전에 가셨어. 문상을 가서 앉았는데 사람이 다 빠지고 상주들까지 자리를 뜨는데도 나는 엉덩이가 안 떨어져서 제일 늦게까지 있었어. 무슨 대단한 사이도 아니었어. 옆자리에서 여러 해를 나란히 서서 서로 자리 봐 주고 잠깐 어디 갈 때 물건 대신 받아 주고 밥때 되면 같이 시켜 먹고 그런 사이지. 그런데 그 언니 영정 앞에 그렇게 혼자 남아 앉아 있으니까, 내 손목이 아직까지도 그 언니가 잡아 준 그 각도로 눕는다는 게 자꾸 생각이 나서 일어나지지가 않더라.

장사를 하면서 내가 정한 건 하나였어. 상한 건 안 판다. 눈으로 봐서 아슬아슬하다 싶은 것도 아예 안 내놨고 그날 못 판 건 두었다가 파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먹었는데, 상한 걸 한 번 팔면 그 사람이 그날은 사 가도 다시는 안 오니까 나는 그 한 번보다 다시 오는 게 필요한 사람이었어. 그거 하나는 삼십 년을 지켰어. 그래서 부자는 못 됐지. 대신 한 번 온 사람이 이십 년씩 왔어. 그게 남는 장사인지 아닌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어.

그 이십 년을 오시던 분 얘기를 해야겠다. 이십 년이면 그 사이에 그분도 머리가 하얘지는데, 어느 날은 자기 뒤에 젊은 새댁을 하나 데리고 와서 내 앞에 딱 세우더니 「여기 아지매한테 사라」 하고 한마디만 하고는 뒤로 물러서더라. 며느리라고 했어.

나는 그때 손에 물을 묻힌 채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어. 새댁은 시어머니 뒤에 서서 나를 한번 보고 내 손을 한번 보더라. 이십 년 동안 내가 그분한테 해 드린 거라고는 상하지 않은 걸 골라 드린 것밖에 없는데 그거를 자기 며느리한테까지 물려주고 가시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날 저녁에 자리를 정리하는 내내 그 한마디가 자꾸 귀에 돌아왔어. 그 며느리가 또 십 년을 왔어. 시어머니가 서 있던 자리에 와서 서서 시어머니가 사 가던 걸 사 가는데, 그러니까 나는 생선을 판 게 아니라 사람을 판 거야.

장사꾼한테 월급날이 어디 있나. 대신 하루가 끝나면 앞치마 주머니를 뒤집어서 털었어. 종일 물 묻은 손으로 받은 돈이라 젖어서 서로 붙은 게 많으니까 판때기 위에 한 장씩 펴 놓고 손바닥으로 문질러 말려 가면서 세었고, 젖은 돈은 두 장이 한 장처럼 붙어서 넘어가니까 나는 꼭 두 번을 세었어. 다 세고 나면 그 자리에서 세 군데로 나눴어. 하나는 집에 들어갈 것, 하나는 내일 새벽에 물건 받을 것, 나머지는 안 건드리는 통에. 안 건드리는 통은 정말로 안 건드렸어. 그 통에 손이 가야 할 일이 왜 없었겠나 싶은데 그래도 안 댔고, 그 통이 나중에 애들 등록금이 됐어.

저녁에 못 판 것을 이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어.
저녁에 못 판 것을 이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어.

남한테 돈을 빌린 건 평생에 딱 한 번이야. 갚는 데 삼 년이 걸렸는데 그 삼 년 동안 나는 그 사람 얼굴을 못 봤어. 미안해서. 그 사람이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언제 갚으라고 재촉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먼저 그랬어. 시장 통로 저쪽에 그 사람이 보이면 나는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반대쪽으로 돌아서 갔어. 돈이 없는 것보다 빚이 있는 게 사람을 더 작게 만들더라.

구십칠 년 겨울이었어. 아이엠에프라는 게 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르는데, 그해 겨울에 시장에서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만은 알아. 자갈치는 원래 사람 등에 밀려서 걷는 데야. 앞에서 오는 사람하고 어깨가 부딪히니까 옆으로 서서 게걸음으로 빠져나가야 하는 데인데, 그해 겨울에는 통로 가운데 서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아무것도 안 가리고 그냥 다 보이는 날이 있었어. 사람이 없는 시장은 소리부터가 달라. 소리가 어디 가서 막히지를 않고 끝까지 그냥 지나가는데, 옆자리에서 물 버리는 소리까지 다 들리니까 그게 사람 마음을 더 내려앉히더라.

생선은 하루만 지나도 못 파는 건데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하나. 저녁이 되면 아침에 받아 놓은 걸 그대로 다시 이고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는데, 처음 며칠은 아까워서 그랬고 나중에는 버릴 데가 마땅찮아서 그랬어. 우리 집이 산복도로라 가는 길이 내내 오르막인데, 아침에 이고 내려갈 때는 이게 다 돈이다 싶던 게 저녁에 이고 올라갈 때는 이게 대체 뭔가 싶어서, 나는 그 오르막을 반쯤 오르면 담벼락에 손을 짚고 한 번씩 서서 숨을 골랐어. 머리에 인 게 아침보다 무거워진 것도 아닌데 저녁에는 그게 더 무겁더라. 그러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불빛이 다 보이는데, 나는 그거 한참 보다가 다시 걸었지.

그거를 우리 식구가 다 먹었어. 그해 겨울에 우리는 생선만 먹었어. 구워서 먹고 조려서 먹고 국을 끓여서 먹고 아침에 먹은 걸 저녁에 또 상에 올렸는데, 나중에는 굽는 냄새가 부엌에 배서 문을 열어 놔도 안 빠지더라. 그 겨울에 내가 반찬거리를 따로 사 본 기억이 없어. 물리지도 않았는지 애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젓가락을 들었어.

앞치마 주머니를 털어서 세 군데로 나눴어.
앞치마 주머니를 털어서 세 군데로 나눴어.

그 사람 배도 그때 몇 달을 안 나갔어. 이쪽도 안 되고 저쪽도 안 되는 건데 우리는 그 얘기를 서로 한 번도 안 했어. 저녁에 밥상 앞에 넷이 앉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밥을 먹었고, 누가 먼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넷이 다 그러고 앉아 있었어. 넷이 다 연기를 한 거야. 서로 다 아는데.

그만두고 싶은 날은 세지도 못해. 겨울 새벽에 일어나서 찬물에 손을 넣을 때마다 오늘 하루만 안 나가면 안 되나 싶었고, 그 겨울에는 나가 봐야 팔리지도 않을 걸 뻔히 알면서 나간다는 게 더 싫었어. 손등이 터서 갈라진 데로 소금물이 들어가면 그게 또 어떻게 아픈지 모르는데, 나중에는 아픈 것보다 오늘도 저기 가서 저러고 하루를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사람을 주저앉히더라.

그런데 나를 붙들어 놓은 건 별것도 아니었어. 새벽에 칼을 갈면 소리가 나. 쓱, 쓱. 숫돌에 물을 부어 놓고 칼을 눕혀서 앞으로 밀었다가 당기면 그 소리가 나는데, 나는 그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그날은 이미 시작이 돼 버린 거라서 그다음부터는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몸이 알아서 갔어. 그 소리는 옆에서 남이 내는 걸 들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내 손에서 나면 다르게 들려. 칼 가는 데 일 분이야. 그 일 분만 넘기면 되더라.

그래서 나가기 싫은 날일수록 나는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숫돌부터 꺼냈어. 숫돌에 물을 부으면 소리가 나기 전에 냄새가 먼저 나는데, 젖은 돌에서 나는 그 냄새를 나는 삼십 년을 맡았어. 물을 붓고 칼을 얹으면 그다음은 손이 알아서 몇 번을 밀고 당기다가 저절로 멈추는데, 나는 그 몇 번 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해. 이불 속에 누워서 나갈까 말까를 재고 있으면 그 재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는데 일어나서 숫돌에 물부터 부어 버리면 더 잴 게 없어지거든. 그러니까 내가 삼십 년을 버텼다고 하면 무슨 큰 각오라도 한 것 같지만, 나는 하루씩을 넘긴 게 아니고 일 분씩을 넘긴 거야.

가벼운 칼은 내가 눌러야 내려가고 무거운 칼은 얹어만 놓으면 칼이 알아서 내려가거든.
가벼운 칼은 내가 눌러야 내려가고 무거운 칼은 얹어만 놓으면 칼이 알아서 내려가거든.

칼도 처음부터 이 칼은 아니었어. 몇 자루를 쓰다가 손에 맞는 걸 하나 만나서 그때부터 그것만 썼는데 무쇠라 무거워서 처음에는 손목이 아프더니, 며칠 지나니까 그 무게가 나 대신 일을 해 주더라. 가벼운 칼은 내가 눌러야 내려가고 무거운 칼은 얹어만 놓으면 칼이 알아서 내려가거든. 그 칼로 하루에 몇 마리를 갈랐는지 그런 건 세어 본 적이 없어. 숫돌질은 또 누구한테 배웠는지 그것도 기억이 안 나. 어느 날 보니까 내가 하고 있었어.

처음에는 생선 손질만 했는데 나중에는 건어물을 같이 놓았어.
처음에는 생선 손질만 했는데 나중에는 건어물을 같이 놓았어.

처음에는 생선 손질만 했는데 나중에는 건어물을 같이 놓았어. 생선은 그날 못 팔면 그날로 끝인데 건어물은 며칠을 두고도 팔 수가 있으니까 둘을 같이 놓고 나서는 마음이 좀 놓이더라. 그렇게 좌판 하나로 시작해서 몇 해 뒤에는 옆자리를 하나 더 얻었어. 판때기 하나가 두 개가 된 건데 자리 하나 늘리는 데 그만큼이 걸렸어. 그게 내가 평생 넓힌 전부야.

넓히지 못한 것도 있지. 나는 열 살에 간호사가 되겠다는 걸 접었는데 이제 와서 될 것도 아닌 그게 요새 자꾸 생각이 나. 복지관에서 어르신들 부축해 드리는 게 그렇게 좋더라. 팔을 잡아 드리면 그 팔이 내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손에 그대로 느껴지는데 나는 그 무게가 싫지가 않아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시간이 한 주일 중에 제일 기다려져. 아, 내가 이걸 하고 싶었구나 싶었어.

무릎이 먼저 갔어. 서서 하는 일을 하겠다고 시작한 건데 삼십 년을 서 있었더니 이번에는 무릎이 안 되더라. 앉았다 일어날 때 판때기를 짚어야 했고 나중에는 짚고도 한 번에 못 일어나서 무릎을 한 짝씩 펴 가며 두 번에 나눠 일어났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서 있는 시간을 좀 줄이면 되는 줄 알았지 일을 놓을 생각은 안 했어. 그게 이제 그만하라는 소리인 줄은 한참을 몰랐어.

이천십 년에 좌판을 접었어. 마지막 날에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자리에 있었는데 막상 정리랄 것도 없었어. 판때기 닦고 물통 비우고 스티로폼 상자에 얼음 녹은 물까지 다 쏟아 버리고 앞치마를 접어서 넣고 나니까 삼십 년 하던 자리가 삼십 분 만에 비는데, 그러고 나니까 그 자리에 남는 게 칼 하나였어.

다 비우고 나서 나는 그 앞에 한 번 더 서 봤어. 처음 얻던 날에 발로 한 번 밟아 봤던 그 바닥인데 삼십 년 동안 내 발이 놓이던 데만 닳아서 거기만 색이 달라져 있더라. 나는 그 색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어. 옆에서 누가 뭐라고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마지막 날 칼을 씻어서 신문지에 싸는데 손이 안 떨어지더라.
마지막 날 칼을 씻어서 신문지에 싸는데 손이 안 떨어지더라.

칼을 씻는데 손이 안 떨어지더라. 삼십 년을 매일 잡은 칼이라 나무 손잡이가 내 손 모양대로 닳아서 남이 잡으면 안 맞는 칼이 돼 있었고, 날은 하도 갈아서 처음 샀을 때보다 손가락 한 마디는 좁아져 있었어. 씻어서 물기를 닦고 신문지를 펴서 날부터 돌돌 마는데, 다 싸 놓고도 나는 그걸 내려놓지를 못하고 한참을 그대로 들고 서 있었어. 집에 오는 길에 버스에서 울었어. 창 쪽으로 돌아앉아서 소리 안 나게 울었으니까 아무도 안 봤을 거야.

그 칼이 지금 우리 집 부엌 서랍에 있어. 무쇠라 사십 년이 됐는데 아직 안 부러졌고 날도 아직 서서 무를 놓고 얹기만 해도 그냥 내려가. 숫돌도 그때 쓰던 그거야. 가운데가 움푹 파여서 이제 새 칼은 못 가는데 이 칼 하나는 아직 잘 받아. 요새는 김치 자르고 무 자르는 게 다인데도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그 숫돌을 꺼내다가 물을 붓고 그 소리를 내. 쓱, 쓱.

두 사람 앉는 자리

네 시 반이면 눈이 떠져. 깨우는 사람도 없고 나갈 데도 없는데 삼십 년을 그 시간에 일어난 몸이라 어김없이 떠지고, 눈을 뜨고도 한참을 그대로 누워서 천장 벽지에 물 샌 자국이 몇 개나 되는지를 세다가 일어나 앉아. 예전에는 눈 뜨는 것하고 일어나는 것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어. 눈을 뜨면 그대로 몸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내려갔고 불을 켜는 것도 물을 올리는 것도 손이 알아서 했으니까 그 사이에 생각이라는 게 들어올 자리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 자리가 통째로 비어서 거기다 별생각을 다 채워 넣고 앉아 있다가 날이 밝아. 어떤 날은 그냥 부엌에 내려가서 칼을 꺼내. 사십 년을 쓴 무쇠칼이라 갈고 갈아서 이제 날이 반밖에 안 남았는데, 숫돌에 물을 붓고 칼을 뉘어서 쓱 쓱 밀면 소리는 그 시절하고 똑같은 소리가 나. 썰 것도 없으면서 갈아. 다 갈고 나면 행주로 물기를 닦아서 도로 넣어놓고 손을 씻는데, 씻고 나서 손등을 보면 이 손도 일을 안 한 지 십오 년이 넘었구나 싶고, 그렇게 한 가지를 다 하고 나도 아직 다섯 시가 안 돼 있어. 새벽이 그렇게 길어. 예전에는 이 시간이면 벌써 시장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좌판마다 알전구가 켜져 있었는데, 이 집은 부엌 시계 돌아가는 소리밖에 안 나서 나는 불도 안 켜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한참을 서 있어.

그러고 나면 물주전자에 물을 받아서 옥상으로 올라가. 산복도로 집이라 골목부터 계단인데 옥상 올라가는 계단은 여덟 개밖에 안 되고, 그 여덟 개를 올라가면 스티로폼 상자 네 개에 심어놓은 깻잎이 있어. 다 해봐야 물 주는 데 오 분이 안 걸려서 이쪽에 주고 저쪽에 주고 아까 준 데 한 번 더 주고 하다 보면 그것도 끝이 나는데, 그러면 나는 빈 주전자를 든 채로 한참을 그냥 서 있어. 나비가 계단 소리를 듣고 따라 올라와. 밥 주는 사람을 알아보는 건지 사람이 있는 걸 알아보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 발치까지 와서 앉았다가 상자 사이 그늘로 들어가 돌아누우면 나는 그 등이 오르내리는 걸 보고 서 있고, 그러는 동안 하늘이 산 뒤쪽에서부터 희끄무레해지면서 아래 골목에 첫 차 소리가 나. 깻잎은 여름이면 감당이 안 되게 올라와서 따다가 간장에 재워놓는데, 그걸 애들이 와야 싸 보내니까 재워놓고 기다려. 안 오면 내가 다 먹어. 혼자 먹는 밥에 깻잎이 세 통씩 있으면 우스운데, 그래도 여름이면 또 심어. 심을 게 그것밖에 없어.

옥상 구석에는 나무 도마가 하나 있어. 좌판을 접던 날에 다른 건 다 두고 그것만 이고 왔는데 삼십 년을 썼더니 가운데가 대접 하나 들어가게 파여서 이제는 뭘 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어서 화분 받침으로 깔아놨어. 미숙이가 올 때마다 저건 왜 아직 두느냐고 지저분하니까 버리라고 하는데 나는 그냥 두라고 했어. 비를 맞아서 거뭇해지고 가장자리가 들떠 손톱으로 긁으면 결이 일어나는데도 가운데 파인 자리만은 그때 그대로라, 물을 주다가 화분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손바닥으로 그 홈을 한 번 쓸어보고 도로 올려놓고 해. 그 파인 데가 손바닥에 딱 맞아.

평상은 그 옆에 있어. 두 사람이 앉으라고 짜놓은 널판이라 한쪽에 앉으면 반대쪽이 꼭 그만큼 남는데, 여름 저녁에 둘이 나란히 앉아서 영도 앞바다에 불이 하나씩 켜지는 걸 보던 그 폭이 아무것도 안 변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 십 년째 나는 그 남는 쪽을 옆에 두고 앉아. 앉기 전에 손바닥으로 한 번 쓸고 앉는 버릇이 있는데 내 앉을 데만 쓸면 될 것을 꼭 저쪽까지 쓸어. 안 쓸어도 되는 걸 알면서도 손이 거기까지 갔다가 와.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하데. 나도 처음 몇 해는 그 말을 곧이듣고 기다렸어. 삼 년쯤 지나면 좀 옅어지겠지, 오 년쯤 되면 그러려니 하겠지, 십 년이면 남들 말대로 되겠지 하고 달력을 넘기듯이 기다렸는데 십 년이 되고 보니 그건 거짓말이더라. 옅어지는 게 아니고 익숙해지는 거더라. 요새도 여름 저녁에 올라가면 평상이 낮에 받은 열을 아직 붙들고 있어서 손을 짚으면 밑에서 따뜻한 게 올라오는데, 그 따뜻한 게 두 사람 몫으로 짜놓은 널판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어서 나는 그중에 반쪽만 데우고 앉았다가 어두워지면 내려와. 그러고도 십 년을 앉았는데 처음 앉을 때는 아직도 몸이 저 혼자 반 뼘쯤 이쪽으로 비켜 앉아져. 사람 하나 들어올 자리를 비워놓고 앉는 버릇이 사십 년 든 거라 그게 잘 안 없어져. 겨울에는 안 올라가. 추워서 못 앉으니까 안 올라가는 거라고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는, 눈이 온 날은 또 올라가서 평상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어. 쓸어놓고 앉지도 않고 도로 내려와. 그러고 나면 그날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리가 후들거려서 난간을 잡고 한참 서 있는데, 그러면서도 내년 여름에는 널판을 한 번 새로 칠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장롱 밑칸에는 그 사람이 배에서 쓰던 수첩이 하나 있어.
장롱 밑칸에는 그 사람이 배에서 쓰던 수첩이 하나 있어.

장롱 밑칸에는 그 사람이 배에서 쓰던 수첩이 하나 있어. 손바닥만 하고 겉장이 비닐이라 물이 묻어도 안 젖게 돼 있는 건데, 종이가 소금기를 먹었는지 넘길 때마다 서걱거리고 귀퉁이는 다 말려 올라갔어. 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날짜하고 위치뿐이야. 몇 월 며칠, 몇 도 몇 분. 글씨는 큰데 줄이 자꾸 아래로 흘러 내려가서 흔들리는 데서 쓴 게 표가 나고, 사십 년을 같이 산 사람인데도 나는 그 숫자들이 바다 어디를 가리키는 건지 하나도 몰라서 앞장은 그냥 넘기기만 해. 그런데 뒤로 넘기다 보면 어느 장부터는 온통 애들 이름이야. 성근 미숙. 줄을 바꿔서 또 성근 미숙. 무슨 말을 덧붙인 것도 아니고 날짜를 적어둔 것도 아니고 이름 넉 자만 열댓 번을 적어놨는데, 그중에 몇 자는 볼펜이 안 나왔는지 종이가 눌린 자국 위에다 도로 덧그어놨어. 심심하면 그걸 적었나 봐. 한번은 성근이 나던 해에 그 사람이 어디쯤 있었는지 알아보겠다고 앞장을 처음부터 한 장 한 장 넘겨봤는데, 어느 장이 그해인지도 못 찾고 숫자만 눈에 어른거려서 그만뒀어. 뭘 생각하면서 적었는지, 적고 나서는 어땠는지 물어볼 사람이 이제 없으니까 나는 그 뒷장만 몇 번 펴봤다가 도로 접어서 밑칸에 넣어. 십 년을 그러고 있는데 아직도 버리질 못하겠더라.

아침 먹고 나면 복지관에 가. 거기서 요가라는 걸 배우는데 처음에는 우세스러워서 뒷줄에 숨어 앉았어. 이 나이에 무슨 요가냐 싶고, 매트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손을 위로 올리라는데 옆에 앉은 할매들하고 서로 쳐다보고 웃기만 하다가 선생 눈치가 보여서 흉내만 냈지. 그런데 한 해 하고 두 해 하다 보니 허리가 조금 펴져. 아침에 일어나서 몸을 세우는 게 예전보다 덜 아프고 학교 앞에 한 시간을 서 있어도 저녁에 그만큼 안 결려. 서예도 같이 하는데 나는 그게 더 좋아. 붓을 잡고 획 하나를 긋는 동안은 아무 생각이 안 나거든. 획이 끝나면 또 생각이 나고, 그러면 벼루에 붓을 적셔서 다음 획을 그어. 그렇게 종이 한 장을 다 채우고 나면 한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있어. 선생이 내 글씨를 보고 획이 세다고 하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서 그렇다는데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어. 평생 힘주고 잡은 게 붓이 아닌데 그 버릇이 붓에까지 남았다는 소리니까, 집에 와서 신문지에다 한참을 더 써봤어.

화요일하고 목요일에는 학교 앞에 서 있어. 노란 조끼를 입고 깃발을 들고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차가 서면 애들을 건네주는데, 애들은 그냥 뛰어 건너려고 하니까 팔을 벌려서 한 번 붙들었다가 손을 잡고 같이 건너야 돼. 애 손이 어찌나 작고 뜨끈한지 저쪽 인도에 놔주기가 아까워.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는 아이가 몇 있어. 이름도 알고 그 애가 몇 반인지도 알아. 사탕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뛰다 넘어진 애나 늦었다고 우는 애한테 하나씩 쥐여주는데, 처음에는 요새 애들이 이런 걸 받기나 하나 싶어서 손에 쥐고만 있다가 못 줬고 그다음 주에야 겨우 내밀었어. 받더라고. 한번 받고 나면 그 애가 다음 주에는 저 아래 골목에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는데, 그 뛰어오는 걸 보면 그날 하루가 다 좋아.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딱 한 시간이고 나머지 시간은 여전히 길게 남아 있는데, 그 한 시간 때문에 월요일 저녁부터 화요일이 기다려져. 비 오는 날은 애들이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뛰니까 더 붙들어야 돼서, 그런 날은 내가 조끼가 다 젖도록 길 가운데 서 있어.

깃발을 반납하고 집에 오면 아홉 시 반이야. 하루가 아직 하나도 안 지나갔어. 시장에 있을 때는 아홉 시 반이면 오전 장사가 한창이라 물건이 반은 나갔을 시간인데 지금은 아홉 시 반에 할 일이 없어서, 밥상을 치우고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널고 그러고 나면 열한 시가 되고 그때부터 저녁까지가 통으로 남아. 텔레비전을 틀어놓기는 하는데 보는 건 아니야. 소리가 나야 집이 안 비는 것 같아서 틀어놓고 그 앞에서 콩나물을 다듬거나 신문지에다 글씨를 쓰거나 하는데, 그러다 고개를 들면 밖이 벌써 어둑해져 있는 날도 있고 아직도 세 시인 날도 있어. 아직 세 시인 날이 더 힘들어.

손톱이 갈라지고 마디가 굵고 손등이 터서 겨울이면 그 갈라진 자리마다 피가 비쳤어.
손톱이 갈라지고 마디가 굵고 손등이 터서 겨울이면 그 갈라진 자리마다 피가 비쳤어.

고마운 사람을 세어보면 둘이 남아. 우리 어무이하고, 자갈치 옆자리 정순 언니. 어무이는 굴을 까서 다섯을 키웠고 정순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온 내 손에 칼을 쥐여줬는데, 두 분 다 손이 험했어. 손톱이 갈라지고 마디가 굵고 손등이 터서 겨울이면 그 갈라진 자리마다 피가 비쳤어. 두 분 다 나한테 뭘 주면서 이건 이렇게 하는 거라고 길게 설명한 적이 없고 그냥 손에 쥐여주고는 돌아앉아서 당신 일을 했어. 어무이는 구십오 년에 가셨고 정순 언니는 십 년 전에 가셨는데, 두 분한테 고맙다는 말을 한 번씩은 했어야 되는 걸 나는 그것도 못 하고 보냈어. 그때는 그런 말을 하는 줄도 몰랐어. 아침에 만나면 밥 먹었나 묻고 저녁에 헤어지면 들어가라 하고, 그게 우리가 서로한테 한 말의 전부야. 살아보니까 나한테 뭘 준 사람은 다 손이 험했더라.

잘한 게 뭐가 있나 싶다가도 세 개는 꼽아. 앉아서 하는 일을 놓고 일어선 거, 사람 손을 보고 정한 거, 상한 건 안 판 거. 그 셋이 참말로 잘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고 어떤 날은 셋 다 겁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싶은데, 그중에 하나라도 안 했으면 지금 이 옥상에 내가 없으니까 그냥 잘한 걸로 쳐.

절에는 가끔 가. 그 사람이 배를 탈 때는 매달 갔어. 초하루면 새벽에 나서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올라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절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뭘 하나 얻어 쥔 사람처럼 발이 가벼웠는데 이제는 빌 것이 없으니까 그냥 앉았다가 와. 무릎이 안 좋아서 오래 못 앉아 있어. 좀 앉았다가 나와서 댓돌에서 신발을 신고 내려오는데, 내려오면서 생각해보면 내가 평생 믿은 게 부처님인지 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 굳이 하나를 대라면 「밥 굶고 댕기면 복 달아난다」는 거야. 우리 어무이가 늘 하시던 말인데, 정작 어무이는 그 말을 하면서도 당신 밥은 자주 걸렀어. 나는 안 걸렀어. 밥때가 되면 반찬이 없어도 상을 차려서 앉았고 혼자 된 뒤에도 국은 꼭 끓였는데, 국이라는 게 혼자 먹자고 끓여도 한 냄비가 되니까 사흘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먹어야 돼. 그래도 끓여. 애들한테 해준 말도 그것밖에 없어. 다른 건 시킬 줄도 몰랐고 시킬 형편도 아니어서 그 말 하나만 붙잡고 애들을 키웠어.

주머니에 사탕을 몇 개 넣고 학교 앞에 서 있어.
주머니에 사탕을 몇 개 넣고 학교 앞에 서 있어.

인생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해줄 말이 없어. 「살아보이 별거 없더라. 지나고 나면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기라」 — 그 말밖에는 못 하겠어. 그때는 죽겠다 싶던 일도, 밤에 누워서 이걸 대체 어떻게 넘기나 싶어 뜬눈으로 새던 일도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게 나를 만든 거더라.

그래서 지금 힘든 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딱 하나만 말해주고 싶어. 하루를 견디라고 하면 못 견뎌. 하루는 너무 길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벌써 저녁이 무서워지거든. 일 분만 견디라고 해. 나는 새벽에 칼 가는 일 분으로 삼십 년을 났어. 숫돌에 물을 붓고 칼을 뉘어서 쓱 쓱 하는 그 일 분만 넘기면 그다음은 손이 알아서 갔고, 손이 가기 시작하면 하루가 저 혼자 굴러가서 어느새 저녁이 돼 있었어. 그 일 분이 쌓여서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쌓여서 삼십 년이 된 거지. 요새도 사는 게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 얘기를 텔레비전에서 보면 나는 그 일 분 얘기를 해주고 싶은데, 늙은이 말이라 안 들을 거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거야. 나도 그때 누가 그런 말을 했으면 안 들었어. 그러니까 하루를 다 살 생각은 하지 말고 일 분만. 그러고 밥은 꼭 챙겨 먹고.

내가 없고 나서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기억할까 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덤 잘 주던 아지매」 그거면 돼. 잘났다는 소리는 안 들어도 되고 훌륭했다는 소리는 더 필요 없어. 저울에 올려서 값을 부르고 나서 검은 봉지에 한 마리를 더 얹어주던 아지매, 그 소리 하나만 남으면 나는 잘 산 거야. 그 한 마리가 남는 장사였는지 밑지는 장사였는지는 삼십 년을 하고도 계산을 못 해봤어. 다만 그 한 마리를 얹을 때 사람 얼굴이 펴지는 걸 봤고, 나는 그거 보는 재미로 삼십 년을 앉아 있었어.

여기는 굴밭도 없고 갯벌도 없고 그 아지매들도 다 없는데, 딱 딱 딱 하고 세 번쯤 나다가 말아.
여기는 굴밭도 없고 갯벌도 없고 그 아지매들도 다 없는데, 딱 딱 딱 하고 세 번쯤 나다가 말아.

소원이 남았느냐고 하면, 손주 셋 결혼하는 걸 보고 싶어. 큰놈이 스물셋이니까 아직 한참 멀었고 그때까지 내가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셋이 다 짝을 지어 앉은 걸 한 번 보고 상 밑으로 봉투를 하나씩 밀어주고 싶어. 그러고 통영에 한 번 더 가보고 싶어. 애들이 차로 모신다고 하는 걸 몇 번을 미뤘는데, 미룬 이유가 다리가 아파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서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 못 갔어. 굴밭이 아직 있는지, 물이 빠지면 아지매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나와 앉는지, 앉아서 딱 딱 딱 소리를 내는지 그것만 보고 오면 될 것 같아. 없어졌으면 없어진 대로 보고 오고. 요새도 새벽에 눈이 떠질 때면 그 소리가 한 번씩 들려. 여기는 굴밭도 없고 갯벌도 없고 그 아지매들도 다 없는데, 딱 딱 딱 하고 세 번쯤 나다가 말아.

애들한테는 끝내 말을 못 했어. 옆에 두고도 못 한 말이 있고 사십 년을 미뤄놓은 말이 있어서 이번에는 적어. 말로 하면 또 목이 안 떨어질 것 같아서 적는 거야. 성근이하고 미숙이가 이걸 언제 읽을지 모르겠는데, 읽거든 한 번만 읽고 접어놨으면 좋겠어.

「성근아 미숙아. 엄마가 말이 없어서 미안하다. 안아주지도 못하고 키웠제. 그래도 니들 둘이 서로 챙기는 거 보면 엄마가 헛산 기 아이구나 싶다. 밥 굶지 말고 댕기라. 그거 하나만 지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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